“좌익․우익”이라는 색깔론 만큼 효과적인 무기는 없다.

내가 1972년도에 윤원구 교수로부터 레닌의 용어혼란전술 강의를 들었던 그 ‘용어혼란전술’이라는 화두가 최근에 무슨 유행처럼 회자되면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인만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잘 못 유행되면 남자가 치마를 입고 여자가 수염 기르는 격으로 정상인의 눈에는 괴물스럽게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5.16이 일어나자 어느 날 모친(1913.3.3생, 생존중)께서 내게 “네 아버지(당시 작고)는 좌익에 부역하지 않은 게 너 앞길에는 참 다행이다. 동네에 부역자가 얼마나 많았는데”라는 말씀을 하셨다.

가정을 잘 돌보지 않은 아버지께 비난의 말씀(?)을 종종 하시던 모친께서 아버지를 두둔하는 말씀을 처음으로 들은 나로서는 당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속으로는 깨나 황당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공을 국시로 삼고....” 등등 혁명공약을 외우면서 반공의 의미와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는 낱말의 뜻과 이 낱말이 사회에 미치는 현실적 기능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육사입학을 위한 신원조회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좌익이라는 낱말이 독립운동 시절에도 있었고 해방공간에서도 사용되었지만 6.25와 5.16을 거치면서 더욱 더 그 의미가 빨갱이로 고착되었다. 좌파라는 용어는 대학 강단에서 학문적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일간지의 정치 또는 사회면 기사에서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YS정부 출범 시 최장집 교수가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임명되자 그의 저서『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중 6.25를 민족해방전쟁으로 기술한 것을 두고 월간조선이 좌파로 몰면서 좌파라는 용어가 일간지에 정치적 용어로 등장하고 그 후 김대중 좌익정권 시작과 함께 좌익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친북반역적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좌파라는 용어로 대치되면서 진보의 가치를 도용하기에 이르렀다.

기록에 의하면 상해임시정부 내에서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였으며 민족진영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고 독립 후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구성을 선호하는 세력인 반면 좌익진영은 소련의 지원 하에 독립 후 소련식 국가체제를 염두에 둔 세력이었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면서 미군정에 의해 상해임시정부의 권능이 불인정됨에 따라 민족진영은 우익으로, 소련의 꼭두각시인 김일성 집단과 남한의 남로당 계열이 좌익으로 불리면서 신탁통치 안을 두고 좌익은 찬탁으로, 우익은 반탁으로 확연하게 나누어지면서 좌․우익 간의 물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6.25의 발발로 좌익은 친북공산주의자이며 속칭 빨갱이로 전락하였고 우익은 이에 맞서 나라를 지킨 애국세력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이 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집권한 이후 친북용공반미 세력들이 자기들에게 씌우진 좌익이라는 어둡고 부정적이며 반역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좌익이라는 용어를 화석화시키고 용도폐기하기 위해 기존의 좌파라는 용어에 착안하여 좌파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좌파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강변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논리를 들어보자.

해방공간에서 횡행했던 좌익과 우익의 대결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60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좌익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좌파는 실패한 역사의 패륜아의 부활인가. 독재체제에서 자유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입고 민주주의를 압살해온 집권세력의 철면피한 만행 때문에 60여 년 전의 좌익적 정신을 이어받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 후 몇 세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 국민의 DNA는 자유민주주의로 굳어졌으며, 이를 부정하는 돌연변이는 도태되는 과정을 거쳤다. 요컨대 해방공간에서의 좌익은 화석화되었던 것이다. 지금 소위 좌파를 당시의 좌익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그것은 정말로 시대착오다.

21세기인 오늘날 좌파·우파 혹은 좌익·우익의 개념은 시장질서에서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허용할 것인가에 따른 것이지, 경제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60여 년 전의 좌우대립은 분명 후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시장질서를 전제로 한 오늘날 소위 좌파는 해방공간의 좌익이나 용공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의 좌파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아직 많은 국민은 좌익, 좌파 하면 공산주의를 떠올리고, 일부 세력들은 이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뀐 후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는 좌파논쟁이 현란하다. 오늘 우리 사회의 좌우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 유발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명철하지 못한 우익은 위와 같이 교모하게 꾸며대는 말장난에 속는다. 함정은 “21세기인 오늘날 좌파·우파 혹은 좌익·우익의 개념은 시장질서에서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허용할 것인가에 따른 것이지, 경제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60여 년 전의 좌우대립은 분명 후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시장질서를 전제로 한 오늘날 소위 좌파는 해방공간의 좌익이나 용공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라는 말속에 있다.

“시장질서에서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허용할 것인가에 따른 것이지,”라는 말은 공산주의에서는 자유시장이 부정되므로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주의 국가를 전제로 깔고 이 국가의 시장에 국가가 자유방임하지 않고 간섭하는 정도의 양과 질을 두고 좌파냐 우파냐로 보자는 취지이다. 사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 중에 시장을 자유방임하는 나라는 없다. 공정거래법, 사회복지법, 소비자보호운동, 복지정책, 경제개발계획 등으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지금은 자본주의 국가의 고전이 된 케인즈 경제학도 좌파 경제학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좌파라 하지 않고 대개 국가재정 지출로 사회복지를 강화할 때 주로 좌파라 하며 이 경우 경제정책면에서 좌파이지 이념이나 정치체제까지 좌파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경제체제’는 단순한 경제정책을 뜻하는 게 아니고 경제체제 즉 공산주의이냐 자본주의이냐 나아가 공산주의 국가이냐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냐를 뜻하는 말인데 오늘날 좌익(좌파)은 경제체제 즉 공산주의 국가이냐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냐를 따지지 않는다고 단정한다.

그런데 우리 애국우익들이 서울역 집회에서 또는 서울시청 앞 집회에서 ‘좌익타도 우익만세’를 부를 때의 좌익은 ‘국가재정 지출로 사회복지 강화를 주장하는 경제정책적 좌파’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경제체제적 좌파 즉 정치적 공산주의자, 다시 말해 자유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김정일에 야합하는 친북용공반미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60여 년 전의 좌우대립은 분명 후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시장질서를 전제로 한 오늘날 소위 좌파는 해방공간의 좌익이나 용공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하면서 그런 것은 60여 년 전의 좌익의 짓거리라고 변명하며 지금은 친북용공반미 좌익은 없다고 생떼를 쓴다. 그리고 6.25 전쟁동안 좌익의 만행, 그 후 끊임없는 간첩단 사건, 5.18사건 등은 자의적으로 좌익의 역사에서 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익들의 용어혼란전술과 논리에 말려들어 좌익은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외쳐대는 우익논객이 있는가 하면 이를 금과옥조처럼 믿는 얼빠진 빠들이 버젓이 큰 소리 치고 있다. 정말 한심한 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좌익․우익’이라는 색깔론 만큼 효과적인 무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