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연 > 오늘의부정부패 > 직원이 1,800억원을 빼돌려도 모르는 건설회사

법원·검찰·경찰 연봉 5000만원 부장… 1900억 회사돈 횡령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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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0.08 03:01

카지노·경마 790억 탕진… 주식으로 150억원 날려…
강원랜드선 '박 회장' 행세…
남은 현금은 7억… 1만·5만원 지폐로 장롱에 보관
토요일인 지난 7월 4일 새벽 3시37분, 강원도 정선 강원랜드에 40대 부부가 종업원들 환대를 받으며 들어섰다. 부부는 꼬박 20시간 이상 바카라 등을 해서 수억원을 잃고, 당일 밤 자정을 넘겨 귀가했다.

부부는 전화 한 통이면 강원랜드에서 고급 차를 보내 모셔오는 VIP였다. 그들은 최근 5년간 강원랜드에 90여 차례 드나들며 총 190여억원을 잃었다. 벤츠·BMW 등 외제차를 몰았고, 도박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판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 박모(48)씨는 연봉 5000여만원의 건설회사 자금부장이었다. 그는 회사에서는 '박 부장'으로 불리고, 강원랜드에서는 '강남 박 회장'으로 통했다.

경찰은 2004년 9월부터 지난 6월까지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회사 공금 1898억원을 빼돌려 도박 등에 탕진한 혐의로 7일 박씨와 부인 송모(46)씨를 구속했다. 경찰 조사에서 부부는 "790억원을 국내외 카지노와 경마장에서 잃고, 150억원을 주식에 투자해 대부분 날렸다"고 말했다. 별장과 아파트도 마련했다. 박씨는 이런 식으로 총 1000억원 안팎을 사용하고, 800억~900억원은 회사 계좌에 다시 입금해 이전에 횡령했던 돈을 '돌려막기' 했다고 경찰은 말했다.

몰락은 지난 6월에 시작됐다. 박씨는 작년 6월부터 지난 2월까지 사기도박단에게 52억원을 잃었다. 검찰이 문제의 사기도박단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박씨가 '피해자'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회사 귀에 들어갔다. 회사 조사가 시작되자 박씨는 7월 8일 휴가를 내고 잠적했다.

그 직후 경찰은 공범이자 부하 직원인 유모(37)씨를 구속하고 박씨를 수배했다. 박씨는 경찰을 피해 회사 여직원 권모(32)씨와 단둘이 서울 강동구의 고급 빌라(264㎡·80평)와 송파구의 또 다른 빌라(66㎡·20평)를 옮겨다녔다고 경찰은 전했다.

박씨는 지난 2일 오후 7시30분쯤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의 한 식당에서 부인 송씨와 만나다 송씨를 미행한 경찰에 붙잡혔다. 검거 당시 박씨는 가짜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었고, 사이클 복장에 선글라스를 쓰고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경찰은 박씨가 마지막으로 숨어 지낸 송파구의 빌라 장롱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1만원과 5만원권 지폐 뭉치 7억여원을 찾아냈다. 경찰은 박씨의 횡령을 도운 혐의로 모 은행 전 직원 김모(50)씨를 구속하고, 박씨의 도피를 도운 혐의로 권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회사돈 1898억원을 횡령해 그 중 790억원을 도박과 경마로 탕진한 혐의로 7일 구속된 건설회사 자금부장 박모(48)씨는 서울의 명문 상고를 졸업하고 고졸 공채로 입사해 부장까지 승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 중인 딸과 대학생 아들이 있었다. 회사 관계자는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두드러지지도 처지지도 않았다"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 주목을 받지 않은 직원이었다"고 했다.

경찰 조사에서 박씨는 "1998년 회사가 파산하고 법정관리를 받게 되면서 회사에 대한 애정이 식은 데다 2001년부터 경마와 주식으로 돈을 많이 잃어 공금에 손을 댔다"고 진술했다. 그는 ▲최근 10년간 자금 출납 내역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점 ▲직속 부하 유모씨와 거래은행 직원 김모씨가 자신의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점을 이용했다고 경찰은 말했다.

박씨는 2004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회사 자금을 운용해 수익을 올리고 다시 넣으면 문제없다"고 김씨를 꾀어 회사가 예치한 '하자보수 보증금'(공사를 마친 뒤 공사비 10％를 맡겨두는 돈) 477억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출금청구서 등을 위조해 서류상으로만 돈이 묶여 있고 전산상으로는 풀려 있게 하는 수법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야금야금 돈을 출금했다고 경찰은 말했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박씨를 통해 예금을 많이 유치하면 승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박씨를 도운 대가로 1000만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 3월 김씨가 은행 본점으로 발령받자, 회사가 '미확정 채무'(소송이 진행 중이라 정확한 액수가 정해지지 않은 빚)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은행에 예치해둔 돈 1567억원에 눈독을 들이고 지난 6월까지 8차례에 걸쳐 898억원을 출금한 혐의도 받고 있다. 회사는 법원 판결로 채무액이 확정되면 은행 본점에서 채권자들에게 돈을 이체해주도록 묶어뒀지만, 박씨는 이번에도 위조문서를 이용해 돈을 빼돌렸다고 경찰은 전했다.

박씨는 또 부하직원 유씨와 짜고 작년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24차례에 걸쳐 회사 운영자금 523억원을 빼돌린 혐의도 받고 있다. 박씨가 예금청구서에 법인 인감을 찍어 유씨에게 넘기면, 유씨가 돈을 출금하는 수법이었다. 유씨는 "돈을 출금해 줄 때마다 수고비로 200만~400만원씩 총 1억여원을 받았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유씨는 이 돈 중 상당 부분을 도박에 썼다.

회사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회계감사를 받았지만, 박씨는 그때마다 은행에 제출할 서류와 회사에서 제출할 서류의 금액을 위조해 위기를 넘겼다고 경찰은 밝혔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150억원으로 주식 투자를 했다가 대부분 날렸고, 200억원은 경마장에서, 250억원은 국내 사설 카지노에서, 100억원은 마카오 카지노에서, 190억원은 강원랜드에서, 50억원은 포커판에서 썼다"고 했다.

그는 경기도 하남시의 16억원짜리 별장(661㎡·200평)을 구입했다. 이밖에도 타인 명의로 송파구의 4억~5억원짜리 아파트(99㎡·30평)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6억원짜리 별장을 산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만약에 대비해 강동구에 전세 3억3000만원짜리 빌라(264㎡·80평)를 얻어 은신처를 확보했다.

박씨 잠적 후 회사 임직원들은 휴가비를 반납해 현상금 3억원을 마련하고, 강원랜드와 고속터미널 등지를 돌며 박씨 얼굴이 실린 전단지 10만장을 나눠줬다.

경찰은 박씨가 추석을 전후해 가족과 연락할 것으로 보고, 부인 송씨를 미행해 박씨를 검거했다. 부인 송씨는 경찰 조사를 받기 전까지 남편이 회사 여직원 권씨와 함께 지낸 줄 몰랐다고 경찰은 말했다. 부부는 검찰 송치를 앞두고 서울 광진경찰서 유치장에 벽 한칸을 사이에 두고 수감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