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정권’의 청구서

 
 
숨막히던 폭염의 끝자락에 문득 들려온 ‘바다이야기’는
푸른 파도와 서늘한 가을을 불러오는 지평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혼탁한 미궁이며 도무지 휘장을 걷어낼 길 없는 불온한 검은 안개였다.
그 검은 휘장 안에 웅크리고 있는 정체를 몰라
자괴감과 당혹감에 빠져 있는 국민 앞에
최고 책임자는 “도둑을 맞으려니 개도 짖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성찰이나 비전보다는 기득권에 뿌리를 둔
부패하고 오만한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다소 취약하지만 덜 때묻은 새 인물에 ‘도박’을 걸었던 것이 지난 선거였다고 한다면,
오늘 그 국민의 ‘도박’에 대한 결산 청구서가 이렇듯
‘바다이야기’로 날아온 것 같아 참으로 민망하다.

인간이 사는 곳에 오락산업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도박에 참여하는 사람이 서민들인데다
상품권 환전이라는 교묘한 방식을 제도화해준 데 있다.
그리고 그 이익금이 각종 명목으로 권력으로 흘러 들어간 꼬리들이 자꾸 어른거린다.
빈부의 양극화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현 정권이
가장 극렬하게 양극화에 기여한 사례로서 웃지 못할 역설(逆說)을 느낀다.
경마·경륜·경정·로또 등 무려 25종의 정부 발행 복권이
서민의 돈을 긁어 세금 징수에 한몫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가운데 터진 ‘바다이야기’는
이 사회의 탁류 위에 헤엄치는 상징적 피라미일 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우울해진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왕조의 취약성과 부패로 인해
국권을 상실했던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그때 조선을 다녀간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 관리들은
하나같이 바깥 세상을 모르고 안일에 빠져서 부패하고 무능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문제를 필두로 하여
철 지난 이념 논쟁, 수구와 보수 논쟁, 작통권 문제, 한미자유무역협정 등
도무지 이 정권이 내놓은 사안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동안 아깝게 쌓아 올린 경제지수에 기대어 허술한 소모전을 펴는 동안
중산층은 추락했고, 경제는 흔들렸으며, 교육은 표류하고, 우방은 돌아섰다.
당연히 국방은 불안하여 국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고 있다.
자주라는 명목하에 전시작통권을 찾아오는 대신
2020년까지 620조원이나 되는 자주 국방비 중 상당 부분을
미국 장비를 사는 데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또 복지국가 ‘비전2030’ 이라는 꿈 같은 청사진을 국민 앞에 제시하려고 한다.
입만 열면 말썽을 일으켜 부실함에 지친 국민에게
희망과 꿈을 준다는 것이 결국 이것인지 묻고 싶다.

그러는 가운데 건강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상실한 사회적 에토스(ethos·기풍)는
온통 ‘어두운 문화’를 향해 미친 듯 돌아가고 있다.
소위 선진 국가 어디에 이렇게 어둠 속에서 흥청거리는 나라가 있는가.
투기와 도박과 요행이 만연된 ‘조폭’구조를 띤 사회에서
젊은이는 일자리가 없고, 인구는 줄고 있으며, 굶주린 북한은 핵을 만들고,
좌표를 잃은 문화는 도박의 바다에 떠있는 거품처럼 표류하고 있다.

정치란 국방이 튼튼하고 경제가 살아 있고
사회를 이끌 정신구조가 희망적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안되면 실정(失政)이요, 망해 가는 사회다.
이 천박하고 부패한 어지러움 속에서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두렵게 입을 여는 심정이 착잡할 뿐이다.
거짓 앞에 침묵하는 것은 거짓에 동의하는 것이다.
침묵은 기회 포착을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라는 점에서 비겁한 지혜일 때가 있다.
도박과 조폭의 행태와 유난히 닮은 정치를 바라보는 심정은 비통하다.
지난 선거의 ‘도박’에서 우리는 실패했다. 나라가 가라앉고 있다.

문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