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계절감기
한나라당의 계절 감기가 또 도진 듯 하다. 이 감기는 잠복하고 있다가, 적절한 환경을 만나면(또는 적절한 환경을 자기가 억지로 만들어서) 겉으로 터져나온다는 점에서 악성이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김정일 사스? 레드 바이러스 사스? 이 독감의 바이러스는 극우적/퇴행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라는 심리적 바탕을 숙주로 해서(실제로는 그 실체가 사라진), 때가 되면 창궐한다.
물론 위력은 전만 못하다. 그들 뒤에 서있는 나팔수들도 이 경우에는 나서서 노골적으로 나팔을 불어대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러나 어떤 낮은 수준에서 그 공포를 재확인시켜서, 그 공포에서부터 정치적 이득을 챙겨온 집단을 묶어두는 역할은 한다. 어쨌든 이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시켜주어야 당분간은 확실한 우군이 되어 줄테니까. 일종의 조직적 신표(信標) 같은 것. 너 빨갱이 아니지? 아, 안심이야, 넌 우리 편이야.
홍사덕 총무가 “김정일을 좋아하는 (국민의)20%가 노무현의 확실한 지지자”라는 말을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듣고 쓴웃음부터 나왔다. 그가 그 말을 하는 자리에 엄숙한 표정으로 둘러앉아서, 겨레와 민족은 혼자서 다 생각하는 듯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의원 나으리들의 표정은 우스꽝스러움을 배가시켜주었다. 물론 내분에 휩싸인 한나라당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부가 분열하고 있을 때에는 외부의 적을 찾아서, 그것을 공통의 적으로 상정해 놓고 다시 전열을 정비한다. 대체 언제적 방식일까?
노무현 지지자들은 김정일을 좋아한다고? 무슨 말씀을. 노무현 지지자들은 김정일 식의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통제형 지도자들을 제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이 싫어서 노무현을 지지했다. 노무현은 김정일과 정반대의 지도자이다. 그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붙잡힌 사람들이 <무게, 무게> 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동안, 욕을 먹어가면서 손에서 권력을 놓아버리고, 권력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분화시켜서 돌려보내고 있다고 본다.
분대장의 <앞으로 돌격!> 소리만 듣고 따라서 움직였던 사람들은, 지금 뭐가 뭔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만만한 게 대통령이라고, 너도 나도 그 혼란을 이기지 못해서 대통령 씹어대는 데 여념이 없다. ‘무게가 없다’‘말을 함부로 한다’ 등등. 오죽하면 여자 경찰관까지 나서서 대통령 험담하는 대열에 참여했겠는가.
이 시대의 망둥이들은 내가 대통령보다 잘나보이는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진 것,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노무현 지지자들이 김정일을 좋아한다고? 김정일을 좋아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보수 야당과 그 주위에 포진해 있지 않은가? 그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는듯한 박정희야말로 김정일과 가장 많이 닮은 지도자가 아닌가? “싸나이 답고”, “화끈하고”, “배짱있고”, “추진력 있고”, 말 안 들으면 잡아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거나 고문한 뒤에 정치범 수용소에 처넣고, 그냥 힘으로 확 휘어 잡아서 앞으로 돌격! 하면 그만이고.
아닌게 아니라, 김정일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만났던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왜 아니겠는가, 두 사람의 정치적 스타일이 똑같으니 말이다. 박정희가 철권을 휘어잡고 있었던 18년이야말로, 지금의 북한 체제와 가장 닮아 있었던 시대였다. 그때 지금 노 대통령을 씹듯이 대통령을 씹었다가는 목을 한 열 개쯤 준비해 가지고 다녔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나는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때에 내 혀에 묶여 있었던 잔인한 재갈을 기억한다. 그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주체적 판단에 의거해 내가 원하는 말을 사용하는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박정희가 시키는대로 따라 말해야 하는 언어의 로봇, 일종의 살아있는 시체 같았다. 나는 자신을 <젊은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불렀다. 말들은 내 안에 고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마치 지금 김정일 치하에서 발설되는 모든 북한 주민들의 말이 진정성을 결한 로봇의 말인 것과 똑같이.
노무현 지지자들이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평화 정착에 기조를 둔 대북 정책에 찬성하는 까닭은 그들이 김정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김정일 체제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화의 파트너로 여기자고 하는 이유는, 그 체제를 수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그를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어야만 경직되어 전혀 경쟁력이 없는 북한의 현 체제를 부드럽게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방법이 아니면, 북한 체제의 소프트 랜딩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김정일이 아무리 미워도 그는 현재 북한 체제의 실권자이다. 그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지 않고는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봉건 제국의 문을 열게 할 방법이 없다.
홍사덕 총무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발언이 위기 상황에 빠진 한나라당 내부를 수습하려는 대내용 정치적 발언이라는 것은, 정치공학을 모르는 순진한 유권자들의 눈에도 환하게 읽힌다. 그러나 대체 언제까지 공동체를 지난날의 공포에 묶어두고 있으려고 하는가. 언제까지 유령을 적으로 설정해놓고, 그에게 돌을 던지는 것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눈을 가리려고 하는가.
한나라당이 지난 수년 간 밤낮으로 해왔던 <김대중 두들겨패기>를 그대로 베낀 <노무현 죽이기>는 이제 효용이 다 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아무리 정당의 목적이 정권을 잡는 데 있다고 하여도, 지켜야 할 정치적 도의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공동체를 갈등 속에 방치하고, 그 덕택에 자기들에게 들어온 기득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은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이다. 하기야 “경제가 나빠야 한나라당에게 좋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홍준표 의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정당으로서야, 공동체가 망가지건 말건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만 사수할 수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절대절명의 변화의 요청 앞에 서있다.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역사의 뒤로 사라질지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거든,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에 대한 진정한 열망을 가다듬어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먼 노무현 지지자들을 빨갱이로 만들어서 내부 결속력을 다지려는 술수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변화할 줄 모르는 구시대의 공룡 때문에 계속 고통을 겪어야 한다. 하루를 살기 위해서 앞으로 남은 수많은 날들을 어둠 속에 빠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코끼리 아저씨, 이제 그만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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