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민주 발끈
“4월 보선 때 신안은 섬이 수백 개라
한시가 급하다며 아들 공천 독촉할 땐 언제고” 민주 발끈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박상천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의 충돌이 심상치 않다. 김 전 대통령과 박 대표는 최근 공개적으로 날선 공방전을 벌였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이 DJ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지난 8월 23일 정세균 의장 등 열린우리당 전직 지도부가 김 전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신당과) 통합을 하느라 수고했다”며 이들을 치하한 뒤, 아직 신당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 민주당에 대해 ‘한마디’를 했다. 그는 “민주당은 지난해 북한 핵실험 때 대북 응징을 얘기하고 햇볕정책을 비난하는가 하면 2차 남북정상회담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민주당의 50년 전통과 맞느냐. 한나라당 얘기 아니냐”고 말했다.
“한나라당 아니냐”는 말은 민주당엔 치명적이었다. 당장 정치권에선 ‘민주당 정통성’ 논란이 일었다. DJ가 민주당을 버리고 민주신당에 ‘적통(嫡統)’을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적어도 이전까지는 ‘어느 쪽이 내 자식이다’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이 “민주당이 아니라 민주당의 일부 지도자에 대한 말씀”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그럼 조순형 의원을 공격한 것이냐. 어떻게 특정 주자만 비판할 수 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민주당은 발끈했다. 박 대표는 8월 2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우리 당의 한 후보가 남북정상회담의 방법론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평화노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같으면 DJ의 말에 토를 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던 민주당이 “당신 말은 틀렸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한 것이다. 박 대표는 다음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김 전 대통령은 정계를 은퇴한 분이다. 그 분 말씀에 의해 현실 정치가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민주당이 DJ의 말 한마디에 왔다갔다하는 정당이 아니라는 취지로 받아들여졌다.
박 대표는 내친김에 “김 전 대통령이 오판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과거 현직 대통령일 때는 보고채널이 다양했지만 지금은 단선채널로만 보고를 받아서 민심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단선채널로 DJ 최측근으로 알려진 특정인물을 지목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엔 동교동이 발끈했다. 김 전 대통령은 8월 28일 최경환 비서관 명의의 보도자료를 냈다. “최근 일부 정치권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지나치다”는 말로 시작하는 A4 용지 1쪽짜리 보도자료는 민주당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찼다. 김 전 대통령 측은 “민주발전을 위해 의견을 개진할 필요성이 있을 때 국가원로로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훈수정치’ 논란에 정면돌파를 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측은 또 “범여권의 분열과 혼란으로 국민의 염려와 걱정이 커지게 되면서 범여권의 대통합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신당 창당 과정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직 대통령은 중대사에 대해 발언할 법적·정치적 자격이 있다. 이런 현안에 대한 언급을 시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훈수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지난 8월 29일 조순형 민주당 대통령 경선 예비후보 선거 사무실 개소식에서 참석한 민주당 지도부.photo 조선일보 DB
8월 29일에는 청와대까지 DJ를 두둔하고 나섰다. 청와대는 정구철 국내언론비서관 명의로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DJ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의견을 내거나 조언하는 것은 의무”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을 했다고 비판의 날을 세우는 민주당 박상천 대표나 일부 대선 후보들의 행동 또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신당을 만드는 데 협력한 전·현직 대통령이 함께 민주당과 박 대표를 협공하는 양상이다.
공방전을 벌이며 민주당에서는 “우리는 DJ를 믿고 사랑한 죄밖에 없다” “아버지(DJ)가 자식(민주당)을 부인하고 있다”는 등 볼멘소리가 나왔다. 사실 민주당은 불과 얼마 전까지 ‘DJ 당(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민주당은 지난 4월 전남 무안·신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DJ 차남 김홍업 의원을 공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박상천 대표를 불러 김홍업 의원의 전략공천을 강하게 부탁했다고 한다. 면담에 배석한 한 참석자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에 걸쳐 “신안은 섬이 수백 개라 (선거운동을 하려면) 한시가 급하네. 빨리 공천을 확정지어주게”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당시는 박 대표가 4·3 전당대회에서 동교동이 막후 지원한 장상 전 대표를 꺾고 대표가 된 직후였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았을 리 없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박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따랐다. 박 대표 측근은 “당시 지역 여론이 안 좋았다. 뇌물로 징역 살고 나온 전과자를 DJ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공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아직 김 전 대통령을 거스르기에는 힘에 부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긴 결정적 계기는 범여권 통합문제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범 여권이 무조건 단일 정당을 만들어 한나라당과 일대일로 겨룰 수 있는 구도를 만들 것을 주문했고, 이에 맞서 박상천 대표와 조순형 의원 등은 “국정 실패세력까지 받아들이는 잡탕식 정당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가장 심각하게 맞선 날은 김홍업 의원이 탈당하던 7월 25일이었다. 박 대표는 그날 광주에서 열린 당원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김효석·이낙연 의원 등이 전날 민주당을 탈당하고 김홍업 의원과 박광태 광주시장은 이날 탈당하기로 돼 있었다. 박 대표는 간담회가 한창이던 오후 2시30분까지만 해도 김 의원이 탈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이날 여러 번 전화로 김홍업 의원을 찾았다. 간담회 도중 김 의원의 측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김 의원 측은 박 대표가 신당에 합류한다는 각서를 쓰면 당에 남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박 대표는 이에 “그렇게는 못한다. 탈당하려면 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실 박 대표는 전 주 신낙균 부대표를 동교동에 특사로 보냈다. 민주당 관계자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김 전 대통령 말대로 통합을 할 테니 김홍업 의원과 박광태 시장·박준영 전남지사는 탈당시키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신 부대표 편에 동교동에 전했다”고 했다. 어쨌든 김 의원 등은 탈당했고, 박 대표는 이때부터 김 전 대통령과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여전히 “민주당과 신당이 합쳐서 단일정당을 만들어 대선에 임하라”는 입장이다. 반면 박 대표는 대선 막판에 후보단일화를 하겠다는 주장이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표가 DJ에게까지 각을 세우는 것은 이때를 대비한 ‘몸값 높이기’ 차원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럿이 우르르 몰려갈 때 신당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홀로 남아 있다 후보단일화 협상 때 더 많은 지분을 약속 받고 합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이번 일이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 주도권과도 관계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당은 호남지역 출마를 원하는 원외(院外)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열린우리당 출신 현역 의원이 다수인 민주신당과 합당할 경우, 총선 공천을 보장 받기 어렵다. 그래서 민주당 내에 독자생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당분간 민주당과 김 전 대통령의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되기는 힘들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양자 간 이번 충돌이 어떻게 정리되는지에 따라, 범여통합은 물론 이번 대선구도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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