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덕에 잘나가던 러시아 경제가 금융 위기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결국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달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러시아 주식 시장은 폭락을 거듭했고 최정점에 달했던 지난 5월에 비해 주식 가치가 70% 이상 떨어졌다. 이는 지난 10년간 러시아가 이룩한 경제 성장이 단지 수치에 불과할 뿐 경제 기초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2000년 이후 유가가 뛰면서 에너지 기업들이 호황을 누렸고, 막대한 외화가 러시아로 몰렸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황량한 도시로 꼽히던 모스크바는 대리석 바닥으로 치장한 쇼핑몰과 부유층 여성들을 위한 숙녀복 상가가 중심가를 덮으면서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크렘린은 이런 경제성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러시아 에너지에 목줄이 달린 유럽 소비자들을 압박하는가 하면 세계 곳곳에 함정과 전투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번 금융 위기는 모든 것을 바꿔 놓고 있다.

그루지야 전쟁으로 인한 투자가의 불안, 그리고 미국발 금융위기, 유가 하락까지 겹치면서 주식 시장은 1998년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 이후 최악의 폭락장을 연출하고 있고, 지난 8~9월 사이 330억 달러가 러시아를 빠져나갔다. 고층 건물 공사가 중단되고, 자동차 등 제조업 생산이 줄어드는가 하면 은행권을 위시한 기업들의 대규모 해고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수백억 달러를 은행권에 투입하기로 약속했지만 많은 기업이 높은 이자율 등 대출 장벽에 막혀 자금난을 겪고 있다. 러시아 건설협회 니콜라이 코샨 회장은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은행권 대출을 받지 못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공사 중단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면서 “이러다간 결국 파산하는 기업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위기 여파는 거리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지난주 인터넷 회사에서 해고된 야나 루제바(20)는 “새 직장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회사에서 잘린 사람들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존에 민간 소매은행과 거래하던 개인은 원금 보존이라도 할 생각에 국영은행으로 거래 은행을 바꾸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유가 하락은 경제 전망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지난주 우랄산(産) 유가가 배럴당 65달러까지 떨어졌는데 러시아 정부는 유가 하락세가 지속하면 내년도 예산을 배럴당 95달러에 맞춰 책정했기 때문에 재정 손실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 투자 계획도 전면 수정해야 할지 모른다.

러시아 당국은 주택, 철도, 항공, 에너지 수송관 등에 대한 기존 투자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분석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번 위기는 세계 3위의 외환보유액, 유가 하락에 대비해 적립해 둔 안정화 기금, 사회보장기금까지 잠식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은 세계 정치 무대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하고자 했던 크렘린의 야망에 타격을 줄 것으로 관측통은 전망하고 있다.

모스크바 소재 카네기 센터의 샘 그린 분석가는 “경제위기는 크렘린으로 하여금 행동을 좀 더 신중히 하도록 할 것이고, 기업 환경을 악화시키는 어떤 모험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석가들은 러시아가 앞으로 6개월을 어떻게 버티느냐에 따라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고, 아니면 1998년과 같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워싱턴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앤드류 쿠친스 유라시아 담당은 “위기가 짧게 간다면 현금을 많이 보유한 러시아로서는 전 세계 각지에 널린 자산을 싼 가격에 사들일 수 있어 도움이 되겠지만 금융 위기가 진정되지 않고 유가가 50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러시아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보유 현금을 써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입력 : 2008.10.19 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