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재향군인 모임에서 귀가하던 박대령은 오랜만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대생들은 서해교전에서 순직한 해군장병들을 마귀로 매도하고 간첩과 빨치산들을 민주인사라 칭하는 욕지기 나는 세상... 요즘들어 박종철 예비역 해병대 대령의 심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만에 재향군인 모임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나 술 한잔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불콰하게 취기가 올라 예비역 육군대령인 정동해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월남전... 우방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역만리 머나먼 정글을 누비던 옛기억이 떠올랐다. 박대령과 정대령은 고등학교시절 전교 1,2등을 다투던 수재였다. 그러나 여느 라이벌과는 달리 서로를 시샘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상대를 자신의 발전을 위한 촉매로 삼아 공부에 정진해 왔다. 둘은 나란히 육사와 해사에 진학했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답게 대양해군의 선구자가 되기로 한 박대령 그리고 성난 사자와 같이 포탄을 무릅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겠다던 정대령... 그리고 그들은 월남에서 만났다. 청룡부대와 맹호부대의 소대장으로... 비록 같이 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함께 베트콩과 싸운다는 동지애와 우정으로 그들은 떨어져 있어도 한 몸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외등이 켜진 골목길을 비틀비틀 어깨동무를 한 채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젊은 아이들 서넛이 담벼락에 붙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자는 짙은 화장과 끈나시, 짧은 청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한눈에도 고등학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순간 박대령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놈들! 나이도 어린 것들이 담배를 피워? 당장 끄지 못해? 그리고 옷차림이 그게 뭐야?"
그러자 그 중의 한 사내녀석이 대답했다.
"에이 씨~X! 아저씨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예요? 우리가 한두살 먹은 어린앤줄 알아요?"
"그래. 니들이 아무리 옷차림이 그래도 고등학생 티가 난다. 그게 학생이 할 짓이야? 우리땐...."
정대령이 미쳐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 여자아이가
"그래요 끄면 될거 아녜요? 재수없게시리... 야. 가자"
그녀는 바닥에 담배꽁초를 던지고 밟아 끄더니 한 남자아이의 허리를 휘감고는 궁시렁거리며 걸어갔다.
"야!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내가 니 애비보다도 열 살은 더 먹었다. 어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그따위로 대답해? 잘못을 지적하면 반성하고 고칠 생각은 않고..."
그 여자애는 "이 할아버지가 미쳤나? 울 아빠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예요? 울아빠 한 마디면 할아버지들 어떻게 되는지나 알아요?"
"이 년이!!!" 다혈질인 박대령은 순간 들고 있던 우산으로 그 여학생의 허리께를 쳤다.
"아야야!!! 이 할아버지가 사람 치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이 할아버지가 날 희롱할려그래!!!"
"이 영감탱이들이 미쳤나? 어디 연약한 여자를 때려?" 하면서 다른 두 사내녀석들이 박대령과 정대령에게 달려들어 난투극이 벌어졌다.
잠시 후 그들은 파출소에 있었다.
"학생들! 이게 무슨 짓이야?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을 그렇게 때리면 어떡해?"
젊은 경찰관 한 명이 학생들을 나무랐다.
"저 할아버지가 술먹고 먼저 행패부렸단 말예요. 절 우산으로 막 때렸다구요. 이 멍자국 안보이세요?"
여자아이는 민망하게도 자신의 배꼽티를 걷어올리고 멍자국을 보여줬다.
"이것아! 고등학생밖에 안된 것들이 밤 늦은 시간에 싸돌아다니고 담배펴서 그러지 말라고 꾸중한 거 아니야!" 정대령이 소리쳤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들아. 이 어르신들이 누구신지 알기나 해? 월남전에서 무공을 세우신 훌륭한 군인들이었어. 제대 후에도 나라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시는지 알기나 해?"
"쳇! 그럼 뭐해요?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면서. 그깟 훈장이 밥먹여줘여? 글구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그런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 할아버지들 아직도 북한이 우리 적이라구 생각한다면서요? 암튼 울 엄마아빠 오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당한 수모 다 갚아주실 거예요!"
맹랑한 계집애였다.
그때 파출소 문이 열리며 40대 중후반의 남녀가 들어섰다.
"보라야!!!" 40대 중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늘씬한 몸매에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성이 그 계집애를 껴안았다.
"엄마! 저 할아버지들이 술먹구 날 마구 때렸어. 얘네들이랑 경찰아저씨들 없었다면 날 강간했을 거야" 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박대령과 정대령은 어이가 없었다.
"이보시오! 그건 사실이 아니오. 당신 따님이 길거리에서 저 아이들이랑 어울려서 담배를 피고 있길래 내가 한마디 했을 뿐이오."
"흥! 그걸 날더러 믿으라구요? 우리 애가 어떤 앤지 알아요? 전교 1,2등을 다투는 애라구요. 쫌있으면 수능이구 학원갔다 오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애 아빠가 지금 정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까 당신들 큰 코 다친 거예요!"
애 엄마는 아이들을 다독거려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곳 소장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르신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 애 부모가 다들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애 아버지는 인권변호사 출신인데 지금 정부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학생운동 한 경력이 있어서 발탁된 듯 싶구요, 애 엄마 역시 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지금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교수로 있습니다. 역시 현 정권에서 자문역을 담당하고 있구요. 여기저기 봉사활동 다니느라고 집안일은 거의 신경을 못쓴다고 합니다. 젠장! 정말 누가 애국잔지 모르겠군요."
그 젊은 경찰관의 말이었다.
"...자네는 젊은 사람인데 요즘 세태에 물들지 않았군. 기특허이." 정대령이 말했다.
"제 조부께서 6.25 참전용사이십니다. 낙동강 전투에서 산화하셨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지만 부모님을 통해서 할아버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공산당이 미워서 경찰이 되셨고 저두 그렇습니다. 대학 다닐 때 운동하는 친구들 모습을 보니 정말 부아가 치밀더라구요. 대를 이어서 경찰이 됐는데 아버지께서도 제 그런 결심을 아시고 격려 많이 해 주셨습니다."
"자네 같은 젊은이가 많아져야 돼. 그래야 이 나라가 희망이 있어. 적과 싸운 용사들은 마귀가 되고 안보를 걱정하면 평화를 위협한다고 하고 간첩들이 민주인사가 되는 세상이야.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구. 저 집구석도 한번 보게나. 운동권 출신이라고 해서 중용되고 집안 단속도 못하면서 봉사활동 한다고 설치고 다니는 여편네를 좀 보란 말이야. 그러니 애들이 저렇게 삐딱하게 큰단 말일세. 지 에미를 속이고 저러구 다니는 꼴 좀 보라구. 말세야 말세.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네들같이 젊은 사람들 이렇게 되다간 큰일난다구!" 박대령은 그 경찰관이 건네준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을 빨아 깊이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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