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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겨울…종로의 노인들은 추웠다

1만원 있으면 ‘부자’… 100원 커피로 몸 녹이고…
김경수 주간조선 인턴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 2004.12.04 08:44 24' / 수정 : 2004.12.04 10:07 32'

“젊은이. 이 휴대폰 얼마야.”

“이거 33만원인데요 할아버지, 24개월 할부하면 한 달에 1만3500원이요.”

“나 이거 하나 줘.”

“할아버지, 아드님 전화번호 하나만 주세요. 저희가 아드님한테 허락 받고 팔아야 돼요.”

서울 종로 탑골공원 인근 노점에서 여든 가까운 노인이 휴대폰을 고르고 있다. 판매원은 노인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곧 끊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해 주지 말라고 하네요.”

노인은 판매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들이 바빠서 그래, 미안하게 됐네”라며 발길을 돌렸다. “어르신. 휴대폰은 어디에 쓰시게요”라며 쫓아가 노인에게 묻자 “친구 사귀려고 그러지”라고 대답했다. 휴대폰 판매원은 “하루에도 몇 분씩 노인들이 찾아와 휴대폰을 사겠다고 하는데 자식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실제로는 한두 분밖에 못 사간다”고 말했다. 2004년 겨울의 종로. 여기저기서 ‘초고속 노령화 사회’라는 말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 종로에 모이는 노인들은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탑골공원 노인들, 대부분 종묘로 옮겨

지난 11월 25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찾았다. 2003년부터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탑골공원의 벤치는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노인들 몇몇이 돌계단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탑골공원 이곳 저곳을 서성일 뿐이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한식당을 운영해 온 한 아주머니가 분통을 터뜨렸다.

“(노인)복지회관에서 무료로 주는 점심 드시러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몰려나갈 때만 노인들이 많이 모이지. 탑골공원 노인들은 이제 모두 종묘로 옮겨갔어. 저 안에 앉아 있을 데가 없거든. 뭐 귀한 게 있는지 (공원을) 아주 단단히 잠가놨다니깐.”

이 식당 앞 자판기 커피는 한 잔에 100원. 커피가 하루에 2000잔 넘게 팔린다고 한다. 노인들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탑골 공원 인근 노점상을 구경하다 종묘로 이동했다.

탑골공원에서 종묘로 가는 종로 거리는 다른 어느 거리보다 65세 이상 노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노인복지센터의 점심시간이 끝나는 오후 1시 반부터 2시까지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노인들은 이 거리의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들어가는 곳마다 손님의 반이 노인들이었다. 한 패스트푸드점의 점원은 “아침에 오픈할 때 들어오셔서 오후 5시까지 계세요. 밖은 추운데 나가시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손님들 들어와서 자리 없는데 계속 자리 지키고 앉아 계시면 답답하기도 하다”며 “1.5리터 콜라병에 소주를 가득 담아 오시는 분도 있다”고 덧붙였다.

돈이 많은 노인들은 이 거리에 몰려있는 카지노 업소도 출입한다. 기본 1만원 이상이 필요한 카지노 업소에서 노인들은 쌈짓돈을 기계에 넣은 채 줄담배를 피우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카지노 업소에서 만난 한 노인의 말이다.

“재미에 하는 거지. 돈 따려고 하는 거 아니야. 가끔씩 10만원짜리도 터지는데, 계산해보면 잃은 돈이 더 많아. 여기 앉아서 화면 보다 보면 시간도 빨리 가고.”

돈은 누가 주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웃음으로 일관했다.

종묘 입구에는 노인을 상대로 한 좌판이 벌어졌다. 뽕짝테이프, 돋보기 안경 등 하나같이 노인들의 시선을 끄는 상품들이다. 이곳에 쭈그리고 앉아 10년째 담배를 팔고 있는 여든 살의 이씨 노인은 충남 서산이 고향이다.

“자식이야 명절 때나 얼굴 보지. 용돈 필요 없어. 내가 몸 움직일 수 있는데 내가 벌어야지. 이거 면세 담배야. 누가 갖다주면 한 보루에 1만4500원 주고 사서 1만6000원에 팔아. 하루에 만원 못 벌어.”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예비역 중사다. 법적으로 자식이 존재하므로 생활보호대상자가 못 된다고 했다. “지들도 살기 바빠, 원망 안해”라고 그는 자식을 변명했다. 심하게 추울 때는 전철역에 들어가 잠시 쉰다고 말했다. 이씨 노인은 서울 신촌의 단칸방에서 보일러 없이 전기장판 하나로 겨울을 보낸다고 한다.

종묘에 들어서니 수천 명의 노인들이 제각각 친구들과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 수원, 인천, 성남 등 지하철이 다니는 모든 지역에서 올라온 노인들이다. 경기도 하남 등지에서 도보로 인근 전철역까지 걸어가 전철을 타는 노인, 대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온 노인도 있었다.

친박정희파·반박정희파로 나뉘어 논쟁

종묘의 분위기는 공간별로 확연히 구분된다. 한쪽에서는 정치 얘기로 험담이 오고갔다. 이들은 친(親)박정희파와 반(反)박정희파로 나뉘어 악을 쓰며 상대를 공격했다. 안주머니에 미 국무성 발표 자료를 들고 다니는 노인, “안기부가 어떤 놈들인 줄 알어!”라고 외치며 자신이 당했다고 소리치는 노인도 있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너나 할 것 없이 높은 이들 두 파는 무료 식사도 따로따로 했다. 친박정희파와 반박정희파의 비율이 7:3 정도로 수적으로는 친박정희파가 더 많았다.

“저 빨갱이들이랑 왜 밥을 같이 먹어. 밥 맛 떨어져. 그러게 38선 건너가지 왜 남았어. 망할 것들.”

“이 정신 나간 인간들아. 아무렴 독재보다 민주주의가 낫지. 총으로 사람 쏴 죽이고 지들은 호강한 인간들 뭐가 좋다고 그래!”

한 사람이 입을 열면 20~30명이 빙 둘러서서 경청했다. 종종 싸움이 벌어져 노인들끼리 멱살을 잡는 일도 있지만 실제로 폭력이 오가는 일은 볼 수 없었다. 싸움 끝에 70대 노인은 60대 노인에게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라며 자리를 떴다. 마포에서 왔다는 70대 노인이 가만히 있다가 큰소리 쳤다.

“나라꼴이 이게 뭐야! 박정희가 큰 솥으로 밥을 한 솥 짓고 죽었지 않어? 전두환이가 그 밥 다 퍼 주는 바람에 그 때 국민들 살 만했지. 노태우는 누룽지 박박 긁어 먹었고. 그 때도 살 만했어! (헛기침) 김영삼? 그 XX는 솥 밑살까지 다 파먹은 놈이야. 우리나라는 새마을운동 다시 시작해야 해!”

노인이 한 말에 여기저기서 “옳소!” “까불지마!” 소리가 튀어나왔다. 종묘공원 안쪽은 바둑판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몇 시간씩 벤치에 마주 앉아 내기 바둑을 두었다. 이곳에도 고수는 있는 듯, 몇몇 고수간 대결에는 사람들이 10여명 이상 모여 선수들이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바둑판 옆은 서예판이다. 서예판에서는 시골 훈장 같은 복장의 노인들끼리 네 글이 좋다 내 글이 좋다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종묘 입구 화장실 근처와 종묘 주차장 인근에서는 40대 후반~50대 여성 30여명 가량이 노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작년 150여명까지 있었다는 이들 여성들은 노인들의 용돈 사정이 어려워지자 하나둘 없어졌다고 한다. ‘공급’이 줄어드는 대신 가격이 올랐다. 1만원 하던 잠깐 풋사랑의 요금은 1만5000원~2만500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은 따뜻한 홍삼 드링크제를 “아빠! 이거 따뜻한 거야”라며 할아버지들에게 건네기도 했다. 7년째 종묘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한 사장의 말이다.

“할아버지들이 이제는 아주머니랑 놀 돈도 없어요. 술도 안 마시는데요 뭘. 그래서 요즘은 아주머니들이 술 사달라고 꼬시나봐요. 같이 술 먹고 나면 할아버지들한테 팁 달라고 해요. 옆에서 보면 미쳐요. 여기 오는 아주머니 손님 90%가 그런 아주머니들이야. 팁은 1000원부터 5000원까지 천차만별이지.”

금반지 맡기며 “데이트 자금 마련하려고…”

주기적으로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노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명절 때나 생일 때 수표를 몇 장 받거나, 금반지를 선물받는 노인이 대부분. 17년째 종로에서 전당포를 운영해 온 한 사장의 말이다.

“IMF 전에는 영감들 많이 왔어. 요즘은 그리 많지 않아. 영감들이야 다 금반지 들고 오지. 죽은 마누라랑 끼던 반지 맡기는 영감도 있어. ‘돈은 어디 쓰시려고요’ 물으면 ‘데이트 자금이야’ 하셔. 다들 신식 노인들이라 재밌어. 맡겨놓고 한 몇 년 안 찾아가면 그 영감은 돌아가신 게야.”

지난 5월,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전화’가 60세 이상 노인 2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60세 이상 노년층 5명 중 3명이 성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가족들의 눈치’가 14%. 종묘 인근 비디오방 사장의 말이다.

“할아버지 열 분 오시면 열 분 다 성인비디오 보세요. 할머니랑 같이 오는 경우도 있고요. 할머니랑 같이 와도 무조건 성인비디오예요. 댁에서는 자식들 눈치도 있고 부끄러우니까 밖에 나와서 비디오방에서 보시는 것 같아요. 1주일에 두세 분 이상은 꼭 오세요.”

노인 대부분은 ‘연애’ 이야기 꺼내기를 피했다. 한 70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젊은이 남자지? 나도 남자야. 젊은이 연애하고 싶지? 나도 연애하고 싶어. 연애하려면 돈이 있어야 돼. 못해도 술값은 내가 내야 할 것 아니야. 나는 하루에 만원 갖고 나와서 한 5000~6000원 쓰고 들어가.(고개를 저으며) 더 깊은 얘기는 우리 하지 말지.”

그는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좋긴 뭐가 좋아. 내 자유가 없어. 아침에 빵, 우유 주는 며느리랑 살아 봐. 그냥 밖에 나와서 아침 사 먹을 때도 많아. 나도 차라리 혼자 살고 싶어.”

혼자 온 할머니를 찾기는 힘들었다. 겨우 찾은 할머니들은 모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한 60대 할머니의 말이다.

“영감 살았을 때가 나았어. 살았을 때 내 속 많이 썩였지. 그래도 아프다 말하면 어디 아프냐, 무슨 약 사줄까 물어보는 건 영감밖에 없어. 자식 새끼들은 아프다 그래봤자 어머니 또 아파요 그래. 자식 필요 없어. 첫 젖 먹인 놈인데도 그래.”

인터뷰에 응한 노인들 대부분은 “자식들에게 돈 나눠준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청량리 시장에서 평생 야채장사를 했다는 70대 노인의 말이다.

“망할 것들이야. 키우고 가르치고 마지막 남은 가게 팔아서 돈도 다 나눠줬는데. 지 에미 쓰러졌을 때 병원비 좀 내라고 전화하니까 서로 나 몰라라 하더라고. 그 때 나도 화병 나서 쓰러졌어. 주지 않는 건데 괜히 줬어. 버릇만 나빠졌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관광버스를 대절해 전국 각지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주로 당일치기지만 종종 1박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번 주 여행지는 경기도 포천 산정호수. 가격은 당일치기 3만원. 종묘에서 ‘관광 아주머니’로 통하는 60대 여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모아 ‘단란한’ 여행을 주선한다고 한다. 포천 여행이 ‘조기 매진’ 되는 바람에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다. 어묵 장사를 하는 50대 남성의 말이다.

“밑지는 장사야 하겠어? 단 몇 푼이라도 남기겠지. 지역마다 가격이 다 다른 거 보면, 돈 남기긴 할 거야.”

“늙으면 돈이 많아야 호강해”

종묘의 ‘킹카’는 한 80대 노인이었다. 취재 중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다. 22년째 종묘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멋쟁이 할아버지를 한참 칭찬했다.

“멋쟁이 할아버지 하나 있지. 올해 여든인데 군수를 세 번씩이나 했대요. 재산이 수십억이래. 삼대가 한 집에서 사나봐. 그분 종종 나오시면 돈 없는 노인네들 담배 다 사주지, 술 사주지 인기 최고야. 예순 넘은 당신 며느리가 아프다니까 파출부도 들여줬어. 멋쟁이 노인네지. 늙으면 돈이 많아야 돼. 그래야 호강해. 젊었을 때 열심히 산 사람들이 늙어서 큰소리 치고 살더라고.”

아주머니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소주 가격을 내린 내 심정을 알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곳에서는 한 병에 3000원 하는 소주가 이곳에서는 한 병에 2000원이다.

“전철이 공짜라 노인네들이 마지막 100원까지 다 쓰고 집에 가. 막판에 우리집 오는데 와서는 ‘안주 1300원어치만 달라’ ‘소주 석 잔만 팔면 안 되냐’ 하시는데 노인네들 불쌍해서 안 줄 수 없잖아. 작년보다도 노인네들 형편이 더 안 좋아졌어. 내년엔 좀 나으려나.”

집에 갈 때 주머니에 100원짜리 하나 남기지 않고 가는 할아버지가 많다고 한다. 전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고 아주머니에게 200원, 300원씩 빌려가는 할아버지들도 있다고 했다. 종로 3가 전철역은 해가 지면 항상 만원이다. 이 한 역에서만 하루에 1만2000장의 무료승차권이 나간다고 한다.

지난 11월 27일 일요일. 종묘 공원을 다시 찾았다. 평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춤판, 술판이 평일에 비해 훨씬 많이 벌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한데 어울렸다. 이들은 뽕짝 음악, 장구 반주에 맞추어 양손을 쭉 펴고 까딱까딱 추임새를 넣으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구석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한 60대 남성은 “저기 아주머니들 80%는 몸 파는 여자들이야, 공원이 이상해, 지저분해졌어”라고 말했다. 한쪽에서는 노동자들이 시위 중이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아코디언과 색소폰 부대의 반주에 맞추어 한 남성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지켜보고 있던 50여명의 노인들 모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손으로 무릎을 탁탁 치며 “아~ 으악새 슬피 우니~” 부분을 합창했다. 노동자들의 함성 소리보다,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뽕짝 소리보다 이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고복수가 최고여!” “하하하하하” 할아버지들은 어깨를 들썩였다.

2026년이면 65세 이상 노인 수가 현재의 3배에 육박한다. 55세에 공기업을 정년 퇴임하고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다는 80세 노인이 호통을 치듯 말했다.

“우리 다 고생한 사람들이야. 재래식 변기 썼어. 니들 신식 변기 쓰는 거 다 우리 덕분이야. 나라에서 단 얼마라도 우리 용돈 줘야 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옆에 있던 84세 노인이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노인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사는 법이야. 6·25 때 나는 지게 짊어지고 포탄 날랐어. 나라 지키려고 목숨 걸었어. …. 너도 늙어. ….”

노인은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해가 지자 노인들은 하나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종로의 밤거리로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빠른 걸음에 치이며 지하철역으로 엉금엉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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