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 天國보다 낯선 사과
▲ 박종성 교수
큰 정치하려고 애쓰는 듯 보이지만 아직 더 많이 학습해야 할 사람이 정동영 의장이다. 선거철 호되게 말실수했던 대목은 벌써 ‘과거분사’이지만 찬찬히 뜯어 들어보면 실수는 계속 ‘진행형’이다. 주요 대목에서 멈칫거리며 이상하게 진도 나가는 걸 보면 앞일이 걱정이다.
뱉어 논 기왕의 말들이 입 속으로 다시 들어갈 리도,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더더욱 그렇다. 카메라나 마이크만 들이대면 이제는 국회에서 ‘싸움질’ 절대 안 할 것이고 민생만 챙기기 위해 온 힘 다 쏟겠다고 한 곡조로 창(唱)을 하지만 며칠이나 갈 약속인지 그것도 지켜 볼 일이다. 약속하는 김에 머잖아 분당(分黨) 같은 건 절대 안 할거라고 말하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선거전부터 대야(對野) 투쟁과정에서 그 역시 부르짖었던 무수한 말의 줄기를 우린 기억한다. 그 가운데 ‘탄핵을 철회하면 대통령에게 사과를 건의하겠다’고 공언한 그의 심사는 분명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난 일이니 그만 두자거나 두루뭉실 뭉개지 말아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말은 호랑이에게 들어보았으되, (먹는 사과도 아니건만) ‘사과’를 흥정의 대상으로 꺼내놓는 정치인은 애당초 본 적 없는 우리 아닌가.
자기 편 대장 욕보인 게 잘못이니 너희가 그걸 순순히 인정하면 우리 또한 예전의 과오를 가급적 수긍하겠다고 조건을 내놓는 것 자체가 꼼수 중 상수(上手)요, 하수(下手)중 극치다. 그렇게 하리라 맘먹고 있었든, 아니면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받았든 이미 내뱉은 그 제안이 ‘치졸’의 극한임을 모르는 동포는 이 땅에 없다. 고작 조건 하나 매단 채 귀엣말이나 전하며 잠시 겸양을 연기하도록 권유한다는 게 집권 여당의 의장으로 대관절 할 일이란 말인가.
바꿔 생각해보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사과란 걸 해야 하는지 마는지조차 판단할 능력이 없을까봐 그걸 이끌어 내겠다고 제안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뜻은 구체적으로 뭔가. 혹시 사과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을까봐 그걸 알려주고 채근하며 끌어내겠다는 뜻이었는가, 아니면 그걸 알고는 있을텐데 자꾸 안 하겠다고 하니 사과하는 방향으로 독려하겠다는 말이었는가. 어쨌든 직무가 정지되어 있던 두 달 가까이 이 문제 하나 생각 못할 만큼 대통령이 ‘청맹과니’였을 것으로 정 의장은 인식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든 말든, ‘사과’는 그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의 고유한 판단 대상이다. 게다가 그 행위는 인간됨을 측정하는 드문 계기이자 색다른 믿음의 원천이다. 그래서 범상한 사람들 사이에선 좀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바꿔보면 그건 선선히 치러내기 힘든 삶의 덕목 가운데 하나이지 누가 간섭하고 알선하여 힘겨운 중재 끝에 이루어지는 역사(役事)는 결코 아니다.
혹여 그것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치자. 그럼 도무지 그게 무슨 빛이 날 것이며 어떤 ‘진정성’이 거기서 스며 나오겠는가. 심지어 대통령을 환호하는 이들에게마저도 조건부 사과가 힘이 될 것이라 믿었기에 그는 그처럼 말했던 것인가. 모두를 껴안고 묵직한 역사의 감격과 ‘열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같이 얘기 꺼내놓았단 말인가.
그러던 그는 며칠 뒤 말을 바꾼다. 그건 또 뭔가. 탄핵 철회 요구에 야권이 바로 응하지 않았기에 이제 그 문제는 의미 없어졌다고 자문자답해버린 저 ‘서두름’ 말이다. 좋다. 이젠 산맥만 짚을 뿐, 티끌 따위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훌쩍 커버린 여당 수뇌라 해도 그는 마저 얘기해야만 했다. 야권이 응하지 않아 탄핵 철회가 물 건너 간 것이라면, 대통령의 사과는 이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것인지. 아니면 하긴 하도록 돕되 자신은 나서지 않겠다는 건지 그것 말이다.
여기에 어떻게든 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또 하나의 자충수로 기록될 것이다. 멋있는 대목에만 폼나게 나타났다 여의치 않으면 돌아가고, 손님 모이면 다시 나타나 우아하게 변신하려는 자세로는 당 통솔은 물론 대 국민 설득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정 의장은 숙고해야 한다. 말하기 전에 한번 더. 어쨌든 탄핵은 이제 과거형이고 사과는 미래 시제로 남는다. 그것도 우러나는 마음으로 대통령 본인이 ‘하겠다’고 판단이 설 때의 얘기다.
백 열 한시간 삼십 분 뒤의 일이든, 아님 아흐레 달빛 지고 그 자리 마련되든 머쓱해도 나서야 한다. 부릅뜬 눈빛들이 그 자리 놓치지 않을 것이며, 스치는 바람도 집어삼킬 고막의 세포들이 그 순간 부여잡고 모두 숨을 멈출 것이다. 한 두 마디로 줄이든, 세네 줄 탄식으로 의식의 속살을 드러내든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역사의 주문(注文)이 저 세월의 솜털을 간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와 도무지 ‘사과’란 말 자체가 낯설어지는 건 또 왜일까. 그렇게 빛 바랜 단어가 ‘관용’이고, 저만치 바람에 묻어간 말이 ‘양해’이건만 이제와 그런 사과라면 받기 싫어지는 변덕 때문일까. ‘사과’로 인해 터진 사단(事端)이거늘, 대통령의 속마음 우물 깊이야 지금도 알 길이 없고 그렇게라도 나설 모습에 되레 언짢아지는 어깃장은 차라리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
하려면, 그냥 해야 한다. 그게 사과다. 조건도 단서도 달지 말일이며 모두가 풋풋하게 듣도록 다가서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다. 용서한다면 다행이고, 냉골보다 서늘하니 오뉴월 서슬 다시 푸르러진들 어쩔 도리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구겨진 채 되돌아오든, 망가진 채 떠나야 하든 곧추선 권력의 감각으로 차갑게 곱씹어 보아야 할 단어가 그래서 곧 ‘사과’다.
나라는 이미 쪽 나지 않았는가. 말해도 듣지 않고 타일러도 대드는 형국은 해방 공간 조선의 그것을 거울처럼 되 비치지 않았는가. ‘찬탄(贊彈)’과 ‘반탄(反彈)’으로 갈려 오줌처럼 욕을 누고 분(糞)칠 마냥 처처(處處)에 미움 발라 한바탕 날 새버린 세상은 이미 원한의 화장실로 변해버렸다. 이 나라 수백만 모니터의 유리판 속이 그렇고 천만의 저자거리 인심이 그 모양인데 웬만큼 진지하지 않는 한, 통과 의례적 ‘사과’가 과연 강토 평정의 무기가 될까.
자식 농사 잘못 지었다고 사과한 대통령도 있었고, 그 대통령 쏙 빼 닮아 약속이나 한 듯 미안함을 표시한 국가원수도 있었다. 하지만 독재해서 미안했고 나라 빚만 왕창 늘려 죄스럽단 고백으로 국민을 숙연하게 한 인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부자지간, ‘쌍(雙)’으로까지 혐의있는 이 나라에 온갖 특권이나 여전한 예우 고스란히 반납하겠다고 무릎꿇는 전직 수뇌 한 사람이 없다. 이런 좋은 나라에 우리가 산다. 이제 또 한 바탕 사과의 김치국 기다리며 때 되면 올라올 밥상만 곁에 둔 채.
모두가 개혁한다고 당차게들 나서고 있지만 쪼개진 땅 바닥은 어느 날이나 촉촉해지려나. 분명한 건 적과 동지 사이에 생각을 달리하기로 합의했다는 현실 뿐,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당장 살점이라도 베어 물만큼 등등(騰騰)한 노기(怒氣)만 그저 저무는 태양 빛 받으며 또렷이 부풀어오른다.
“×까! 탄핵이 무횬데 사과는 무슨 놈의 사과야."
(박종성·서원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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