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69/ 구슬픈 들판에서(메아리)<수정판>
아래 글은 1979년 11월 3일자 한국일보 3면의 칼럼 ｢메아리｣란에 실린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스크랩해 둔 기억이 갑자기 나서 스크랩 묶음을 여기저기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ꡔ세계전후문제시집ꡕ(신구문화사, 1962)이란 책에 베껴두었던 것을 오늘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신나게 여기 베껴 써 봅니다.
이 글에는 필자 이름이 없는데, 아마도 무기명 고정 칼럼이라서 필자 성명을 일부러 안 밝힌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쓴 분이 지금도 생존해 계시다면 만나서,
“25 년 전에 쓰신 이 글, 지금도 감명 깊게 읽혀지는군요.”
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정도로 저는 이 글이 마음에 듭니다.
* 원문의 줄바꾸기(문단나누기), 온점 첨가, 한자표기 삽입 등등 일부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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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픈 들판에서
구슬픈 날, 가을날은 괴로운 밤 꾸는 꿈 같이
모든 생명을 울린다.
아파도 심하구나.
음산한 바람들 세고
뚝 가의 마른풀이 갈기갈기 젖은 후에 흩어지고
그 많은 사람들도 문밖 그림자 볼수록
한 줄기 연기 곁을 길고 파리한 버들 같이 쓰러진다.
소월의 시 한 수.
음산하고 구슬픈 가을날이다.
쓸쓸한 바람결에 황금빛 낙엽이 흩날리며 소리 없이 종을 울리니, 하늘과 땅도 적막한 시각이다.
그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이 시심(詩心)과 더불어, 구슬픔과 쓸쓸함을 달랠 길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 가을은 울적함을 더하여 어쩔 수 없이 제행무상(諸行無常)함을 절감하게 된다. 늦은 가을이 가져 온 무상의 풍물과 풍경을 피할 길 없다.
시인과 나란히, 우리는 황량한 들판에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을철의 구슬픈 모습, 인생의 적막만이 아니라, 역사의 황량함이다. 거친 바람 이는 역사의 언덕에서 우리는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셈이다. 실로 제행무상은 삶의 근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실상인 걸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발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스산한 산과 들에서 태초부터 걸어온 발길이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찢기고 비가 오고 눈이 흩뿌려도 역사적 인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간다. 이제껏 걸어온 길이 멀고 험하였다면, 이제부터 걸어갈 길은 더 멀고 험할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걸음을 옮겨 지금 여기를 뒤로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역사의 새 길을 걸어가야 한다.
무상이란, 다시 말하면, 변화이다. 삶과 역사는 끝없는 변화의 도정이다. 삶의 철리는 가르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영원하다는 것을. 광야에서는 길이 어디로든지 열릴 수 있다. 서둘지 않고, 당황하지 않으며, 차분히 앞을 가리면 길은 열리는 법이다.
역사의 길에선 겸허하되 자신을 가누어야 한다. 그리고, 미지를 개척하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운명을 개척하여야 하니 말이다.
천하의 이치는 신비한 것이다. 성현도 말한다.
“천하의 지극히 신비함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
‘천하의 지극히 신비함이’는 ‘천하의 지극한 신비함이’로 바꾸어야만 말이 될 것으로 봅니다. 위의 따옴표 안의 말씀은 노자(장자?)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1979년 당시, 조선일보와 더불어 단 두 개의 조간신문 중 하나였던 한국일보의 3일자에 실렸다는 것은 필자가 이 글을 박대통령 장례식 날인 11월 2일 중에 썼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케 합니다. 7일장으로 기억되니까.
따라서 이 글은 박대통령의 급서(急逝)에 대한 허무감을 표현한 글임이 분명합니다. 이 기회에 박대통령의 명복을 간절히 비는 바입니다.
“어른다운 어른은 인생의 허무감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
이라는 것이 저의 평소 인생관입니다.
허무감이 인생을 엮어 가는 주류여서는 안 되겠지만, 인생의 진면목에서 허무의식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을 인정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을 저는 ‘어른’으로 쳐다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도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엮어봤자,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 허무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중에서 좀 괜찮은 허무를 골라잡으려고’ 애쓰는 자세는 꼭 필요한 것이니까 절대로 얼렁뚱땅 아무렇게나 살지는 맙시다.”라고.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씨 등등의
천방지축 까불이들은
제 눈에
“21세기 세계여사 무대에서의 어린애들”
정도로 보이는군요.
본인들은 약간 기분 나쁠 터이지만,
전 이들 세 명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고
거짓말을 하기 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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