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의 말장난
이영민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간사
해방후 반공청년운동의 대부였던 유진산은 그가 이끌어준 김두한에게 “빨갱이보다 더 나쁜 것이 회색분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라리 드러내놓고 빨갱이 색깔을 분명히 한다면 쉽게 파악이 되지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이 회색분자는 도무지 색깔파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에는 바로 이 회색분자들이 득실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 대표로 있는 강재섭 의원이다. 정계입문후 지금까지 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길을 걸어왔다. 이는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박철언 ․ 김영삼 ․ 이회창을 거쳐온 그의 갈짓자 행보는 명실공히 제1야당의 대표로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그토록 소망하던 당 대표가 되고 난 뒤에도 강재섭 의원은 도대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원래 소신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온 인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원내의석 126석의 거대 제1야당의 대표로서 모든 정치현안에 대해 당당히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정국을 주도해나가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다 죽어가는 식물인간과도 같은 노무현과 열린당의 눈치를 보며 항상 숨을 죽이고 있다.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모기소리만 하게 죽어 들어간다. 이러니 그를 따르는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는가.
최근의 전효숙 헌재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파동을 보면 이것은 처음에는 순전히 민주당 조순형 의원의 고군분투로 문제제기가 되었으나 그 전개과정에서는 한나라당의 강재섭 대표가 아니라 이재오 최고위원의 ‘원칙’을 내세운 강경론이 사태를 주도했다. 강 대표와 김형오 원내대표 등 지도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뚜렷하고 일관된 대안 제시도 없었던 반면 이 최고위원은 처음부터 전 후보자의 지명절차가 헌법위반임을 분명히 한 뒤 절차상의 잘못을 법사위 상정으로 받아들이자는 민주 ․ 민노 ․ 국중당 등 다른 세 야당의 중재안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거부입장을 밝히고 ‘전 후보자의 자진사퇴’ 또는 ‘지명철회’ 주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또 이들 비교섭 세 야당의 중재안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의원들의 찬반표결로 결정하자는 김 원내대표의 제안에 대해 고성을 지르며 퇴장함으로써 자칫 온건론으로 돌아설 수도 있었던 당 분위기를 원천봉쇄해버리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문제에 대해서도 임채정 국회의장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만나 직권상정을 하지 말아줄 것을 직접 설득하며 담판을 시도함으로써 끝내 전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키고 헌재소장 공백사태를 장기화시켜 버렸다.
한 때 비교섭 세 야당의 중재안에 대해서 다소 긍정적 입장을 보였던 강재섭 대표는 이 최고위원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야3당 중재안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돌아서 버렸고 일부 온건파 의원들의 “본회의 표결시 실력저지보다 표결에 불참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는 주장도 쑥들어가 버렸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당의 대표인지 국민들로서는 심히 헷갈릴 만도 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9월 21일 관훈토론회에서 강 대표의 리더십 부족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자신은 원래 전효숙 후보자 임명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기자들이 오해해서 보도가 조금 잘못됐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식으로 빠져 나갔다. 그러나 전 후보자 임명 청문특위부터 국회 본회의 표결의 무산까지 그 전개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들이라면 오히려 강 대표의 말이 사실과 다른 말장난인 것을 다 알 수 있다.
최근 한나라당이 뒤늦게 방미외교단을 보내는 등 법석을 떨고 있는 전시작통권 환수문제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이에 대해 국회에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강재섭 대표 자신부터가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계속 갈팡질팡 하다가 급기야 군 원로들의 반대성명 발표와 항의방문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따라가는 행태를 보였다.
심지어 의원총회에서 작통권 환수반대결의를 하기로 해놓고 당 대표가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남으로써 상당수의 의원들이 덩달아 이탈을 하는 바람에 결의문 채택이 무산된 일도 있었다. 그래놓고는 지금에 와서 각계 각층에서 작통권 환수반대성명이 나오고 국민여론도 압도적으로 환수반대로 기울고 있자 한나라당은 때늦은 뒷북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관훈토론회에서 문제제기가 있자 강 대표는 또 “당이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넘어갔다. “만일 한나라당이 먼저 나서서 장외집회 주도하면 사회 각계 각층 인사들이 뛰어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만일 한나라당이 그랬더라면 ‘자주 문제로 표를 얻겠다’는 노 대통령의 전략에 말려들었을 것”이며 “안 그랬기 때문에 재향군인회, 성우회, 교수, 전직 외교관 등 ‘의병’들이 일어설 수 있었다”며 자화자찬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궤변의 극치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전략적 유연성’이란 한 마디로 한나라당이 전시작통권 논란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인데 제1야당이 대통령과 집권당의 매국행위를 방조한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지 그런 말로 미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친일파들이 자신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인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의 그 전략적 유연성 때문에 한 미정상이 이미 작통권 환수에 합의해 버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강 대표의 그런 논리대로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을 포기하는 것도 전략적 유연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여야의 영수는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한 사람은 전형적인 편집증과 과대망상 증세를 보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고 소심불안증과 우유부단함을 보이고 있어 도무지 나라가 제대로 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설픈 풍수가 집안 망치고 섣부른 무당이 사람 잡는다’ 는 말이 있듯이 섣부른 대통령과 어설픈 제1야당 대표로 인해 국민들만 매우 불행해지고 있다. 차라리 자신이 없으면 홍준표 의원의 주장대로 강 대표가 중도에 용퇴를 하는 것이 자신과 당을 위해서 또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어차피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백 배 나은 당 대표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보수 제1야당의 대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지만 제1야당의 대표 또한 능력도 없이 욕심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강 대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지난 80년 8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할 때 TV에 한 중견 언론인이 나와 “나라를 위해 용단을 내리셨다”고 말한 장면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591020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