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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또 핫바지 되란 말여유?"

날로 거세지는 충청권 민심
주민들 “행정수도 옮긴다며 집 팔라 꼬드기더니…" 분노
연기=윤석이 연합뉴스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 2004.11.20 09:42 45' / 수정 : 2004.11.20 12:58 19'

“평생 농사밖에 모르는 순진한 농민들에게 행정수도로 표 달라 손 내밀고, 집값 오른다며 땅 팔라 꼬드기고, 토지 보상해 준다고 도장 달래더니 이제 와서….”
“이곳이 전라도나 경상도 같았으면 이렇게 억울하게 당했겠습니까.”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 결정 직후인 지난 10월 28일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신행정수도 건설 사수 제1차 범국민대회’에서 만난 지역 주민들의 성난 목소리다.

충청권에서 행정수도를 옮겨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정치인들이 나서서 특별법까지 통과시켜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고는 위헌 결정으로 못온다고 하니 울화통이 치민다는 것이다.

이날 충남 공주시 금학동 손두병(65)씨는 “정부가 먼저 행정수도를 건설해 준다고 해서 믿었는데 이렇게 중단돼 우리 충청도 사람들은 또 핫바지란 소리만 듣게 됐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충청도 양반의 매운 맛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충남 연기군 장기면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행정수도 예정지로 발표됐던 연기(남면, 동면, 금남)·공주(장기)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물질적인 피해는 자못 심각하다.

연기군 조치원읍 최미라(여·41)씨는 “그동안 논란도 있었지만 많은 주민들이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데 허탈하기 그지없다”며 “연기 주민들을 무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권과 정부, 헌재의 처사에 분노마저 느낀다”고 말했다.

신행정수도 반대 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안원종씨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활동을 해온 주민들도 위헌 결정이 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며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허탈감은 시대를 떠나 무엇으로도 보상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의 경제적 피해도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신행정수도의 정확한 입지가 확정되면 땅값이 크게 오를 것을 우려해 대출을 받아 상대적으로 값이 싼 부여, 논산 등에 땅을 미리 사놓은 농민들이 첫 피해자가 될 전망이다.

▲ 헌법재판소 판결과 관련 '연기군민 총궐기대회' 참석자들이 삭발하고 있다.

실제 연기군 남면 임모(55·농업)씨는 “보상을 받아 인근으로 나가 살려고 부동산을 담보로 농협에서 6억원, 사채로 2억원을 빌려 2600평의 농지를 구입했으나 수도 이전 무산으로 한 달에 500만원의 이자만 물게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보상을 기대하고 수백만원의 빚을 얻어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빈 밭에 나무를 심은 주민들도 많았다.

내년 농사도 문제다. 땅값이 평당 5만원 하던 때도 농사를 지어 대출이자 갚기에 바빴는 데 외지인들에게 15만원 이상 팔린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어봐야 수지타산이 맞겠느냐는 것이다.

남면의 한 주민은 “예전 같으면 벼베기를 하고 나면 논바닥에 짚이 수북이 깔려있었으나 신행정수도 바람을 타고 보상 욕심에 소를 많이 입식하는 통에 사료로 쓸 짚이 떨어지는 일까지 빚어지고 있다”고 털어왔다.

주민간 갈등의 골 깊어만 가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 깊이 팬 갈등의 골이다.

헌재 결정 이전에는 신행정수도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찬성하는 주민들을 비난했지만 요즘은 반대했던 사람들이 찬성해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육해일(46) 남면 농민회장은 “행정수도를 반대해왔던 일부 주민들은 수도 이전을 반대하는 세력에 빌미를 주고 헌재의 위헌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금남면 종촌리 이모(41)씨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땅도 사고 집도 샀겠지만 농사 지으며 간신히 밥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남의 일”이라며 “원주민들이 외지 땅을 미리 산 것은 보상을 노려 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면 양화리의 한 50대 주민도 “정부에서 보상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행정수도 이전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땅을 왜 미리 사느냐”며 “투기를 한 주민들에게까지 정부가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행정수도 이전을 찬성했다는 정모(44·남면 종촌리)씨는 “수도 이전에 대한 입장차이 때문에 주민들끼리 자리도 함께 하지 않는 등 마을이 삭막한 분위기”라며 “예년 같으면 단풍관광 등으로 마을 분위기가 한창 흥겨웠을 때”라고 말했다.

이러한 반응에서는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선정된 행정수도 건설이 정치권의 갈등으로 좌초되면서 빚어지고 있는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현재 정부와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행정특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 신행정수도 무산에 따른 대안들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상선 충남지방자치분권운동 운영위원장은 “신행정수도 건설을 지지해 왔던 것은 이를 통해 서울을 비롯해 온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라며 “충청권 달래기식의 어떤 대안에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행정기관 몇 개 옮기기 식의 대안은 과밀화된 서울을 살리겠다는 신행정수도 건설의 추진 명분을 살리지 못할 뿐더러 충청권 등 지역 균형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민간기업이 토지 수용권을 갖는 기업도시나 ‘과학기술+행정도시’ 등도 새로운 내용이 아닌 데다 현실성도 크게 떨어져 ‘또다시 충청도를 현혹한다’는 정치적 역풍만 맞을 가능성이 크다.

“주민 이용하려 했다간 폭동 날 것”

김용교 충남도 행정수도건설지원단장은 “정부 과천청사나 대전청사 건립이 균형발전이나 지역발전을 진전시켰다는 평가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또 지금까지 거론된 대안들로는 연기·공주 주민들의 피해 보상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행정수도 건설이 중단된 데 따른 피해 보상이 필요하다는 총론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정부 보상의 근거가 미흡한 데다 피해 형태나 규모가 제각각 다르고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주민 감정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기군 금남면 박진찬씨는 “땜질식 처방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주민들을 이용하려했다가는 폭동이라도 날 것”이라며 “어떤 대안으로도 주민들의 엄청난 피해를 보상할 수 없는 만큼 신행정수도 건설만이 대안”이라고 말했다.

심대평 충남지사도 “주민피해 보상 방법은 행정수도 예정지 2160만평을 정부가 모두 사주는 것뿐”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헌재의 결정 취지대로 국민투표 등 국민합의를 거쳐 신행정수도를 재추진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신행정수도 건설은 지역 이기주의가 아닌 국토균형발전의 유일한 대안”이라며 “따라서 철회되거나 백지화돼서는 안되며 일관된 국가 중요정책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요구대로 정부와 여당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개헌이나 국민투표와 같은 초강수를 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충청권 주민들의 고민은 더욱 깊다. 국회 원내 2당인 한나라당의 반대가 여전한 데다 최악의 경제상황과 4대 개혁법안 처리 등 현안이 산적해 있어 결과를 낙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정수도이전범국민연대 이창기 상임대표는 “개헌 추진은 물론 정부, 여당이 야당과의 합의 없이 어떠한 대안을 내놓더라도 발목을 잡힐 게 뻔하다”며 “섣부른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국회에 여·야 공동의 특위를 구성해 신행정수도 문제를 포함한 국가균형발전의 대안을 논의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고 말했다.

결국 충청권 주민들은 정부와 정치권의 해법 제시에 또다시 주목하고 있지만 그 눈초리는 예전과 달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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