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민간인 대통령의 통치 아래 2년 반이 흘렀고, 아직 2년 반이 남은 오늘, 나는 뜬금 없이 대통령 퇴진을 고민해 본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전임자들의 임기 중에도 ‘퇴진’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적잖이 있었지만, 나는 대개 부정적이었는데, 그들이 정치를 잘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정치를 대체할 ‘다음 정치’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나름의 과학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과학도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노무현 대통령은, 요즘 세상을 소란스레 하는 여러 문제 - 부동산 사태나 도청 사태, 후진 정치 같은 것이 몽땅 전임 정권들에 의해 빚어졌고, 자신만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외로운 선지자인양 행동하고 있는데, 실상은 노 대통령 본인 역시 전임자들 못지 않은 주범이자 몸통이다. 부동산 사태와 도청 사태, 낙후된 정치는 특정 정책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과신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을 전혀 수용치 않는 오기로부터 뻔히 예견돼 온 것이다.

부동산 문제부터 시작해보자. 노 대통령은, 국민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서민 주거 안정을 약속해왔다. 그리고 돌아 서서는, “장사 원리에 따라 소신 있게”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에 반대(04. 6. 9)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발 사업에서 “큰 판을 벌이겠다(04. 6. 11)”고 공언했고, 수도권 공장 설립 규제 해제와 행담도 개발을 직접 지시했다. “건설 경기는 반드시 살리겠다(05. 2. 25)”는 취임 2주년 국정연설은, 투기꾼들에게는 천재일우의 투기 정보로 받아들여졌을 게다. 노 대통령은 이처럼 구체적인 투기 진작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강력하지만 추상적인 주거 안정 의지를 가끔 밝히는 것으로 국민의 불만을 모면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 곁의 투기꾼이자 탈세범인 이헌재와 홍석현을 중용하고 비호했다.

“건설산업이 경기를 유지해 가야 그것이 경기를 활성화하는 것이고 국부가 축적되는 것이다(04. 7. 16).” 노 대통령이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 건설업 대부분이 재벌들 돈벌이이고, 재벌이 최대의 정치자금 기부자라는 사실 말이다. 동북아중심․경제자유구역․기업도시․신행정수도․한국판뉴딜 같이 전국토를 투기화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서민 주거 안정을 이루겠다는 것은 하루 열 끼씩 먹으면서 다이어트하겠다는 거짓말이나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야말로 1등 투기꾼이다. 입에 발린 빈말로 ‘투기와의 전쟁’을 벌여 서민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집이 아니라 노숙용 텐트나 관일 것이다.

몇 년이나 공을 들여가며 애지중지하던 홍석현씨가 끝내 낙마하자, 노 대통령은 문제를 불법도청으로 몰아가며 ‘국가 범죄’에 격노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 범죄가 아니라, 체제 범죄 더 정확하게는 범죄적인 체제이다. 재벌이 돈으로 대통령 후보와 검사를 매수하여 나라를 말아먹는 짓보다 더 큰 체제 범죄가 어디에 있겠는가.

노 대통령은, “한국에서 부패 없는 투명사회 건설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다 …… 이제 더 이상 정경유착은 없다(05. 5. 24)”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노 대통령이 ‘정부 혁신을 직접 챙긴’ 덕택에 기획예산처와 외교통상부와 노동부가 삼성인력개발원에 교육을 위탁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 기치인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나 ‘동북아 허브’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안한 것이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간 것(05. 5. 16)”은, 노 대통령이 “기업이 바로 나라(04. 9. 20)”라는 소신에 따라 삼성에 국가를 매각했기 때문이다. 음험한 정경유착은 사라지고, 투명한 정경일치가 지배하는 것이 노무현 집권하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이번 도청 사건은, 청와대 만찬에 초청받았던(05. 5. 28) 삼성 법무실장이 잘 마무리 지을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는, 이학수씨와 삼성 비서실에서 함께 근무했던 하급자를 국가정보원 국내 정보총책으로 슬그머니 특채했다. 이제 삼성이 더 이상 도청당하거나, 도청 내용이 폭로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이라는 놀라운 뉴스를 접했을 때의 첫 느낌은 “과연 YS의 적통”이라는 것이었다. 틀렸다. 단연 청출어람이다. 바른 소리 잘하는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 별 정책 차이가 없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대연정을 하거나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단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왜, 이같이 획기적인 정치개혁방안을 제안하지 않았지? 정치개혁 여론이 드높고 노 대통령 지지가 굳건하던 취임 초기나 지난 총선 때에는 왜 지역주의를 극복하려 하지 않았을까? 대통령직인수위 정치개혁연구실이 마련한 정치개혁방안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동진 정책’이라는 해괴한 정치 전략과 그 부속물이라 할 중대선거구제가 등장하게 된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지역주의 최대 피해자를 자처하는 노 정권이 지난 2년 여 간 일관되게 펼친 정치 전략은 지역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의 지역주의 전략이 전라․경상․충청 세 지역 중 두 곳을 엮는 지역연합 전술이었던데 비해, 노 정권의 지역주의 전략은 전임자가 만들어 놓은 지역연합에 기반하여 동진을 꾀하는 지역침투 전술로 발전하였을 뿐이다. 경상도에서의 열린우리당 동반 당선을 낳을 중대선거구제에 노 대통령이 집착하는 이유도 그에 다름 아니다.

지역주의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에서든 정책과 이념 경쟁은 계급이나 계층의 상이한 사회경제적 이익으로부터 비롯되고, 계급 정치에 기반하지 않는 선진 정치는 존재한 적 없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누구의 대통령이고자 하는가?

노무현 정권은, 아시아나 사측과 경영자총협회의 요청대로 긴급조정권을 발동하여 노동자 파업을 봉쇄하였다. 파업이 ‘국민경제를 위협(노동조합법 76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오히려 올라가는 주가가 증명하고 있었지만, 한쪽으로만 열려 있는 노 정권의 귀는 ‘시장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여름휴가를 떠나야 할 경영자총협회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할 위험(노동조합법 76조)’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도 하지 않았던 파업 봉쇄를 감행했다.

헌법 제 79조에 의한 대통령의 권리는 부패 정치인들 -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선대위원장, 정치자금을 관리해준 총무본부장, 고등학교 선배를 사면하는 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노 대통령은, 사면권과 긴급조정권을 축소 폐지하겠다던 국민과의 약속보다는 개국공신을 우대하는 봉건적 미풍양속과 언제나 가진 자의 편에 선다는 지배자의 도덕율에 철저하였다. ‘중대한 재정ㆍ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 필요한 재정ㆍ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헌법 76조)’을 내릴 수 있는 대통령의 권리는 망국적 부동산가 폭등이나 시름겨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고 있는 것일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국민은 그런 대통령을 가지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에 성실하겠다던 취임 선서를 ‘자본의 자유와 이윤의 증진’에 맹종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취업계약서를 어긴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국민의 절대 다수를 고통스럽게 하는 대통령은 물러나 마땅하다.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은, “잘해보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밝힐 게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공약을 깨고, 식언을 거듭한 상습범이다. 노 대통령 말마따나 “대통령에게 별 힘이 없다”면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찾아본다 한들 별 탈이야 생기겠는가.

대개의 우리 국민은 정상화된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막연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 어지간하면 다음 선거 때까지 참아주자.” 이것은 너무도 비정상적이었던 과거 정치에 대한 악몽과 자신의 손으로 이룬 민주주의에 대한 정당한 애착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상 정치에 대한 콤플렉스와 1987년에 이룬 민주주의의 한계 즉, 직접 선출할 수는 있으나 통제하지는 못하는 한계로 인해 위정자가 자본과만 대화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와 경제와 언론을 독점한 자본 권력 이외에, 여타의 다른 사회정치세력과 일상적 민주주의 제도가 형성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에만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쩌면,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 속도를 ?아가지 못하는 절대 권력 -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해주는 것이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네 명의 대통령에게나 안녕을 보장하는 것은 그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망각케 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국가권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재확인하고, 미래 사회의 전범이 될 또 한 번의 역사적 격변이 필요하다. 대안 정치가 준비되지 않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평온한 생활을 위협할 혼란이 뻔할지라도, 민중의 고통은 너무 깊고 18년의 고요는 너무 길었다.

  2005. 8. 24.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