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코드, 아니면 검찰의 노 브레이크
봄은 완연한데, 재계는 돌연 한파에 휩싸이고 있다. 윤상림 로비 사건의 불씨가 계속 살아 있는 가운데 전혀 뜻하지 않게 김재록 로비 사건이 잇따라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순한 금융계 로비 수사가 아니라, 한국 재계 심장부의 하나인 현대자동차 본사를 검찰이 덮치자 모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론스타 서울지사에도 압수수색이 실시되자, 외국 언론들沮?톱뉴스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파장이 어디로, 얼마만큼 확대될 것인가.
이쯤 되면 으레 제기되는 의혹이 “정부가 왜 이러나. 도대체 정치적 배후는 무엇이며, 검찰 수사는 무엇을 겨냥한 것인가”하는 의문들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결코 검찰 수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시중에는 별의별 시나리오성 소문이 다 나돈다. 정치적 음모설에 대해 청와대는 화를 냈고 여당에선 펄쩍 뛰고 있지만 믿으려 드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분위기다.
아무튼 김재록 검찰 수사에 어느새 “게이트”라는 말이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단순 형사사건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 다시 말해 심각한 배후관계나 비리가 잠복해 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두번 풀어 준 뒤 구속한 까닭 뭘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들을 일단 정리해 보자. 첫째 김재록이라는 인물이 DJ정부 이후 갑자기 부각된 금융계의 마당발이었으며, 둘째 그는 남다른 처세술과 친화력을 발판으로 이헌재 전 부총리와 진념 전 장관 등 당시의 고위 관료들과 가깝게 지냈던 것은 사실이며, 셋째 그들의 도움 여부를 떠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그동안 많은 이권을 따내는데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넷째 현대자동차와도 정몽구 회장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점 등이 주변의 여러 사람이 확인해 주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이것들 가지고는 죄 될 게 없다. 사람 안다는 게 무슨 죄가 되나. 문제는 법을 어긴 내용이 과연 무엇이었나가 밝혀져야 하는데, 이건 수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김재록이라는 인물이 유별난 처신을 통해 고위층들과의 친분을 희한하게 유지해 왔으며, 또한 그것을 여러 비즈니스에서 자신의 우월적 지위로 충분히 활용하면서 영향력을 급속도로 키워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장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위법 여부를 떠나 그런 것이야말로 수완이라면 대단한 수완이랄 수도 있다. 누구든 초대면하는 자리에서부터 예사롭게 “형님 아우” 하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나 세상 분위기는 이렇게 차분한 분석이나 느긋한 접근을 용납하지 않는다. 훨씬 드라마틱한 해석을 점치고 기대한다. 하필이면 왜 지금 터졌느냐, 왜 현대차냐. 온갖 분석과 해석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음모설’ 아니면 ‘코드설’로 집약된다. 음모설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5월 31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불과 두 달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 주목한 데서 출발한다.
여당과 검찰의 깊은 교감 속에서 지방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시기 조절까지 해가면서 김재록 사건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김재록이 호남 출신이며 그가 교분을 맺어 온 다수가 DJ정권 이후 주로 호남 인맥이라는 점에서 좀 더 길게 보고 호남 쪽의 아킬레스건을 장악하기 위한 책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럴듯한 구석도 없지 않으나 일견 너무 고전적이고 도식적인 시나리오다.
코드설의 요체는 역시 현 정권 실세들이 주도해온 재벌 때려잡기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특히 삼성은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는데 현대는 눈치없이 가만있다가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판이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는 여의도 증권가 주변에서 나오는 루머 수준의 억측들로 보인다.
오히려 문제는 정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수사는 철저히 검찰 자체의 판단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종전과는 달리 청와대나 여당이 검찰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하지 못할 뿐더러,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라는 해석이다.
윤상림 로비 때도 그랬지만 이번 김재록 수사도 사전에 여당은 물론 청와대와도 전혀 사전 교감 없이 진행돼 왔다는 것이다. 워낙 이런 정부 발표들이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된 경우가 많았던지라 전혀 믿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른 것 같다. 수많은 음모설이나 코드설보다 이 같은 ‘순진한 해석’이 오히려 더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근거는 청와대의 면면들이 이런 ‘작전’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런 일 같으면 당장 문재인 민정수석이 보고받고 챙기고 끼어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봐도 별로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특정 야당 압박용’이란 분석도
청와대가 사전 보고를 검찰로부터 받았다고 해 봤자, “법대로 하겠습니다” 하면 당연히 “법대로 하라”는 말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걸 레임덕이니 권력 누수 현상이니 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이게 바로 노무현 정부가 처음부터 지향했던 바와 결코 무관치 않다. 검찰의 독립을 통해 정치권력의 시녀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큰소리쳐 왔으니 말이다.
여당의 핵심 실세인 Y의원도 음모설에 손사래를 친다. “검찰이 너무 독립적이어서 문제입니다. 청와대나 여당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듣는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 그 사람들(검찰), 자기네가 해야겠다고 하면 그냥 밀고 나갑니다. 오히려 너무 그래서 문제예요. 때때로 누가 브레이크를 잡아줘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하려는 사람도 없고 한다 해도 듣지도 않을 사람들입니다.”
검찰 내부의 분위기부터가 그전과는 전혀 달라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젊은 검사들이 법대로 하겠다며 밀어붙이는데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경험 많은 고참이랍시고 공연히 정치적 고려 운운했다가는 협잡했다고 망신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판단이나 경제적 파급 영향 등은 검찰의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형사적 기준으로 위법 여부에 초점을 맞춰 수사해 나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 수사 동기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여야를 떠나 정치적 중립 입장을 고수한다 해도 검찰의 수사 자체가 검찰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적 한건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것 역시 결코 순수한 검찰권 발동이라 보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청와대나 여권의 개입설보다는 “검찰의 자체 판단” 쪽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를테면 지금의 김재록 사건이나 론스타 수사가 검찰의 국민에 대해 실추된 인기를 만회하려는 차원에서 더더욱 서둘러 파고드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재계는 더더욱 긴장하고 겁 먹을 수밖에 없다. 정치적 감안이나 경제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고 ‘법대로’ 모든 걸 파헤치고 둘러엎을 경우가 가장 무섭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본사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 조치 등이 바로 그거다.
재계로선 차라리 청와대가 개입하고 여당이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었던 때를 더 그리워할 것이다. 청와대가 시켜 표적 수사를 당했다면, 청와대를 상대로 로비를 통해 해결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요, 여당에 미운털이 박혀 벌어진 일이라면 여당 의원들을 찾아가 빌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옛날 검찰이 아니다. 그러니 재계가 더 당황해 하는 것이다. 사람도 왕창 바뀌고 말도 잘 안 통한다. 법대로 하겠다는데 막을 명분도 마땅찮다. 사방에서 지뢰 터지듯이 묵은 사건들이 예상을 허용치 않으면서 터져 나오니 황당해 하고 있을 뿐이다.
일부 퇴직 임원-부품업체 원성 사
김재록이라는 개인의 문제는 이미 넘어섰다. 그를 촉발제로 해서 이미 현대자동차라는 거대 기업의 안방으로까지 파고들었고, 윤상림 로비에 얽힌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문제까지 겹쳐서 정씨 가문은 이미 상당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게다가 현대차를 둘러싼 계열 기업들간 자금 이동 문제가 어차피 까발려지게 될 것이 뻔하고 보면 자동차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후폭풍을 한차례 예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검찰이 언제까지고 계속 줄기 따라 고구마를 캐들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든 간에 적당히 봉합하는 선을 결정하지 않겠는가. 그 선이 어디쯤 될 것인지를 지금으로선 누구도 확단할 수 없으나 현대자동차 그룹의 승계 문제에 영향을 주는 선으로까지 비약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아무리 젊은 검사들이 원칙대로 수사를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현대차만 다른 기업에 비해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는 비난은 피하려 할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러 다른 기업들로까지 수사를 지나치게 확대시켜 나가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의 칼이 그야말로 독자적인 판단에서 휘둘러지고 있다면, 자신들이 벌인 이 사건들의 매듭 또한 독자적으로 여하히 지어나갈 지를 지켜보는 것도 대단한 주목거리가 될 것이다.
김영욱 중앙일보 경제전문기자
197162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