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정체
국가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보수는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
이영민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간사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끝난 지 꽤 되었는데도 조갑제씨는 무슨 작심을 한 듯 전남 선암사에 내려가 있던 이재오 의원을 향해 연일 語砲(어포)를 쏘아대었다.
“한국인은 정치인을 평가할 때 반드시 이념검증을 해야 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국민의 당연한 권한인 공직자에 대한 사상검증을 ‘색깔론’이라고 비방하는 자는 反 대한민국적 생각의 소유자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 좌파가 만든 용어를 사용하여 자유진영 인사를 공격하는 우파는 우파의 탈을 쓴 좌파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하듯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고 적절한 타이밍이 있는 것이다. 화장실에 가는 사람에게 휴지를 주는 것은 알맞은 친절이지만 화장실을 다녀온 사람에게 그와 같은 일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입사 후 대리 ･ 부장 ･ 이사를 거쳐 내일 모래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물망에 오르고 있는 사람에게 난데없이 주주들도 아닌 제3자들이 나타나 “저 사람은 아무래도 수상하다”느니 “산업 스파이 같다”느니 하고 나서면 누구라도 그 당사자를 의심하기보다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부부가 결혼하여 10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동안 시부모 잘 모시고 남편 잘 섬긴 아내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당신 혹시 결혼 전에 딴 남자가 있지 않았느냐”는 둥 “혹시 지금도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다그치면 이보다 더 억울하고 기막한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혼하자는 말 밖에 더 되는가.
이재오 의원의 사상이 문제가 있다면 애당초 신한국당 시절인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그를 영입할 때 철저히 검증을 하였어야 했다. 입당 후 10년의 세월이 흐를 때까지 당내에서 아무런 말이 없다가 그가 3선의원이 되고 의원들 다수의 지지로 원내대표까지 된 후 대표직에 출마하자 갑자기 지금 와서 30년 가까이 지난 사건을 끄집어내며 사상이 이상하다느니 전향을 한 것이 맞느냐 느니 하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이재오 의원이 빨갱이라면 그동안 그에게 공천장을 준 김영삼 ･ 이회창 총재는 물론이고 그의 지구당원들과 그를 뽑아준 지역구민들 모두 빨갱이에게 동조한 것이 된다. 그리고 필자가 알기로는 강재섭 대표도 그동안 선거 때마다 여러 차례 당의 공천심사위원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천심사과정에서 그같은 사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은 바로 강 대표 자신이 그동안 직무유기를 한 것이 아닌가.
或者(혹자)는 이번 한나라당 대표경선에서 이재오 의원이 1위를 한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당원이 아닌 일반국민들을 조사대상으로 한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당 대표경선에 당원도 아닌 사람들이 나서서 특정후보를 겨냥하여 연일 신문광고를 통해 비난성명을 낸 것 또한 명백한 3자개입이 아닌가. 바로 이런 것이 정치공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조갑제씨는 경선후 이재오 의원이 결과에 불복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70년 신민당 전당대회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한 김영삼이 승리한 김대중에게, 또 79년 신민당 총재경선에서 패한 이철승이 이긴 김영삼에게 승복한 사실을 예로 들며 이 의원에게도 깨끗이 승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는 원래 당수인 유진산이 대통령 후보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김영삼은 그 자리를 자기가 가로채기 위해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으나 자신만으론 세가 부족한 느낌이 들자 김대중을 설득하여 동반대결의 장으로 끌어낸 것이었다. 김대중은 원래는 75년 대통령 선거를 목표로 하고 있었고 70년 후보경선에는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소장파 의원들과 맞대결을 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수 유진산은 출마를 포기하였고 후보경선은 김영삼 ･ 김대중 ･ 이철승 등 40대 소장파들끼리의 대결구도로 돌아갔다. 이 때 김영삼은 당수인 유진산이 같은 구파출신인 자신을 밀어줄 것이라 착각하고 당선을 자신하였으나 유진산은 철저히 중립을 지켰고 대통령 후보 자리는 김대중에게로 돌아갔다. 어찌 보면 김영삼은 남의 떡을 거저 빼앗아 먹으려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 되었는데 그래놓고 어떻게 경선결과에 불복할 수 있었겠는가.
조갑제씨는 또 79년 신민당 총재경선에서 패한 이철승이 김영삼에게 승복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당시 이철승이 마음 속으로 경선결과에 대해 깨끗이 승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선후 이철승 계보의 지구당 위원장 3인이 일부 대의원들의 자격에 대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여 결국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무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여기에서 발전하여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10. 26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물꼬가 터져 버린 것을 조갑제씨는 모른단 말인가. 필자는 이래서 그가 교활하다고 본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역사적 사실도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쪽으로 교묘하게 포장을 해놓기 때문이다.
이재오 의원이 자기 입으로 경선결과에 불복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는 선암사로 내려간 뒤 기자들에게 전당대회 때 받은 색깔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머물고 있는 것이며 자신이 당 대표가 되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10년 동안 함께 한 동료에게 색깔을 덧칠하려는 한나라당의 행태에 화가 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百技不如一誠, 百思不如一行(백기불여일성 백사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다. 즉, 백 가지의 기술이 있어도 성실함 한 가지보다 못하고 백 번 좋은 생각을 한다 해도 한 번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보고는 애국을 위해 지갑을 열라고 해놓고 자기 지갑은 절대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입으로는 노무현을 타도하자고 해놓고 전자개표기 부정시비가 일자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며 앞장서서 변호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앞뒤가 안맞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정말 전향을 했다고, 그래서 탈북자를 도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뻔질나게 중국을 드나드는 사람이 보수정당의 공천권을 행사하면서 보수성향의 중진의원들을 물갈이하고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영입해서 당의 색깔을 흐려놓았는데 그런 사람을 믿으라고 하는데 과연 그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닐까.
햇볕정책에 대한 국민여론이 비판적이자 그 햇볕정책을 한 DJ 보고 “치매걸린 노인”이라고 해서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이 알고 보니 불과 4년 전에는 “저는 햇볕정책 지지자입니다. 서해교전은 분단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의 진심이 무언지 절로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명색이 민정계 5선의원이요, 한 때 대선후보까지 꿈꿨다는 사람이 원내대표를 시켜 놓으니까 한다는 짓이 여당이 제출한 법이란 법은 모두 다 통과시켜주고 거기다가 당의 대통령 후보가 낙선했을 때는 최고위원중 가장 먼저 나서서 소장파들과 손잡고 “최고위원들 모두 동반사퇴 하여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당을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구차하게 특정인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면서까지 당의 대표가 됐는데 일부 세력은 당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내년 대선에 반드시 이길 거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팡파르 소리가 내년 대선에서 패배를 예고하는 장송곡처럼 들렸다고 한다.
이재오 의원은 적어도 이런 치사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야당의 원내대표로서 분명한 선명성을 보여줬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지난 번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과 연계하여 민생법안 통과를 반대하고 있을 때 여당이 날치기를 하는 상황에서 본회의장에서 몸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한 의원은 이재오 ･ 송영선 두 의원 뿐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야당의 모습이란 말인가.
독신녀인 직전 당 대표가 혼자 으리으리한 대궐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비해 이 의원은 3선의원임에도 작은 집에서 청렴한 생활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남민전 사건에 대해서도 이재오 의원은 자신은 당시 교사들 지하조직인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지도부라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신군부가 계속 자신을 잡아두기 위해서 억지로 ‘남민전’ 사건과 연루시킨 것이라고 해명했고 공안검사 출신인 최병국 의원 또한 그의 사상을 보장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또 검찰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실린 그의 혐의를 읽어봐도 별로 대단한 것은 없다.
조갑제씨는 이재오 의원이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였다고 비난하는데 그렇다면 당시 이라크 파병에 찬성했던 여당 의원들은 모두 우파였단 말인가. 1964년 당시 공화당 정권이 월남에 파병하려고 할 때 당시 보수 제1야당인 민중당은 처음에 이를 반대하였고 공화당의 정구영 ･ 차지철 등 일부 의원들도 반대 의사를 밝혔었다. 그리고 지난 98년 김대중 정권이 동티모르에 국군을 파병할 때 한나라당은 당론으로 반대의사를 밝히지 않았던가. 강재섭 의원도 그 때 당론에 따라 파병에 반대했던 것으로 안다. 우파라고 해도 국회의원으로서 국익차원에서 심사숙고한 결과 경우에 따라 파병에 찬성하고, 반대할 수도 있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고 좌파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반대하는 의원들도 각자 그 이유가 다를 수 있다.
평생을 언론계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언론인을 사칭하고 다니면서 이런 것까지 들춰가며 “이재오는 안된다”고 해놓고 그러면서 “원희룡은 포용해야 한다”고 하고, 또 “오세훈은 그래도 한나라당이니까 찍어줘야 한다”, “손학규는 저평가된 우량주”라고 하고 다니는 등 꼭 미친 년 널뛰듯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갑제씨 등이 말하는 좌파의 기준은 도대체 뭔가. 그리고 그 기준은 왜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달라지는 것인가. 자신들의 눈에 안 맞으면 무조건 빨갱이인가. 그리고 시류에 따라 변하는 보수도 보수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보수애국세력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누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나 를 따지기보다는 항상 스스로 도덕성을 확보하고 국가를 위해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특정인에 대해 사상검증을 한다고 하면서 누가 봐도 선거브로커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 국민들이 과연 그런 것을 지지하겠는가. 이것이 명색이 보수언론인이라는 사람이 할 짓인가.
이번에 강창희 전의원이 예상을 뒤엎고 3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된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세계 의정사에 길이 남을 추태인 DJ와 JP간의 ‘의원임대’ 사태 당시 그는 끝까지 홀로 이에 저항하다가 자민련을 탈당했다. 항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던 JP는 나라보다는 항상 자신의 권력욕과 蓄財(축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좌익과도 손을 잡고 연립정권을 창출했고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차용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국민들에게 지탄받는 썩은 보수의 모습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한나라당의 대표였던 사람은 판단력도, 철학도, 소신도, 이념도 없이 막연히 자기 아버지 이미지만 팔고 다니다가 김정일을 만나고 와서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당의 싱크 탱크인 여의도연구소에서 대표적 보수정치인 두 사람을 지목해 축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을 때도 이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연구소에서는 그 전에 일찌감치 그에게 “지난 두 번의 대선패배는 당의 이념이 지나치게 우경화된 것이 원인이므로 보수노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라”는 보고서를 올렸다고 하며 그는 이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그는 지금까지는 ‘운 좋은 바보’였을 뿐이다. 그의 이렇게 허약한 자세로는 내년 대선을 승리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 비록 운좋게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제2공화국 장면 정권처럼 약체 내각이 되어 정권의 운명이 6개월 이상 갈 수 있을 지도 매우 의문이다. 이런 사람을 무조건 보수주의자라고 밀고 나갔다가 나라의 운명이 불행해지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런데도 굳이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밀어야 한다는 세력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재오 의원이 산사 생활을 정리하고 상경한다고 한다. 비록 강재섭 대표로부터 사과는 받지 못했으나 일단 당무에 복귀하기로 했다고 한다. 필자는 화끈한 사나이 이재오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면서 무엇보다도 그의 복귀로 인해 그동안 교활한 보수, 썩은 보수들의 비난과 공격으로 보수야당이 처했던 분열의 위기가 무사히 봉합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1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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