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걱정없이 적지 않은 돈을 벌면서 사는 어느 기업인으로부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지금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표현을 무리한 과장이라고 되받거나 또는 뭐라 달리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루 36명꼴로 발생하는 자살 중 상당부분이 궁핍한 탓이고 이는 총만 직접 겨누지 않았을 뿐 우리 사회가 다 거들어 이뤄지는 학살이라고 못박았다. 차라리 직접적인 생명 박탈행위라면 방치되거나 애초에 생기지도 않겠지만, 복잡한 사회구조를 돌고돌아 맨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니 누구도 이게 학살인지조차 모른다는 지적이었다.
최근에 행정자치부의 통계 하나가 공개됐다. 한나라당 이원형의원이 요청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빈곤자살이 올들어 월 58명꼴로 발생하고 있다. 좀 섬뜩한 이야기로 하자면 우리 사회가 요즘 한달에 58명씩을 `학살`하고 있는 셈인데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실도 아닌 과장에 불과한 걸까.
빚에 몰리고 절망에 쫓긴 나머지 세 아이의 엄마가 아이들 둘을 차례로 고층아파트에서 떨어뜨리고 막내아이는 함께 안고 떨어져 생을 정리했을 때 우리는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 엄마의 독함을 탓하고 사회를 비난한다. 또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결정적인 건, 이러한 반응에 바로 `나`는 실종돼 있다. 나 때문에 저 일이 벌어진 건 아니라는 인식, 또 내가 저일을 벌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는 생각. 그래서 그냥 지나간다.무슨 말인가. 그 끔찍한 사건의 책임을 내가 나눠져야 한다면 세상 일이 다 내 탓이라는 논리가 되는데 그게 말이 되는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을 각 구성원의 탓으로 다 돌릴 순 없다. 아울러 숱하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다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돌릴 수도 없다. 맞는 말이다. 다만 도무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자살을 유발케 하는 경제 사회적 압력, 즉 자살압력이 너무 높아져 있다는 점, 빈곤층이 너무 빠르게 양산되고 있고 그럼에도 정부나 사회의 외면 속에 저 아래 그냥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돼야 한다.
정부는 얼마전 81만명의 소액 신용불량자 구제계획을 내놓는 등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이미 진행하고 있는 수준에서 신용불량자 문제를 처리한다는 입장이어서 추가적인 효과를 거둘지도 미지수다. 정부가 지금까지 금융기관을 살린다, 기업을 살린다 해서 156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열성에 비하면 경제의 중요주체인 개인의 신용불량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절박성을 덜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공적 자금 투입과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절박성부터 인정해야 일이 풀린다.
한국이 빈곤한 사회일까. 그렇지 않다. 먹고 살만한 경제수준이다. 그래서 더 부끄럽다. 사회가 빈곤해서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제도의 빈곤으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죽어나가고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현상 정도로 치부한 채 그냥 지나가고 있고, 그게 부끄러운 일이다.
빈곤한 사람들에게 비친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탐욕과 몰인정의 사회로 비쳐서는 안된다. 최소한의 관심과 안타까움은 잊지 않고 있다는 믿음을 구체적인 제도와 실행으로 보여야 마땅하다. 우리가 그 정도의 수준에는 다다른 게 아니었단 말인가.
소득 2만달러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한달에 최소한 58명이상이 빈곤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데도 이것이 매우 절박한 해결과제라는 공감조차 못 얻는 사회엔 미래가 없다. 이 58명의 빈곤자살이 다름아닌 학살이라는 섬뜩한 지적에 대해 부분적으로 맞는 얘기임을 공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2만달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 저작권자 ⓒ머니투데이(경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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