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김영삼 전대통령님, 진실을 그대로 밝히십시요"
YS(김영삼 전대통령)가 그 특유의 침묵 칩거에 들어갔다. 그의 정치적 아들이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 강삼재 의원이 역사 앞에서 내린 중대한 결정으로 `안풍(안기부예산전용의혹)사건'의 900여억원의 정치자금의 출처가 YS이며, YS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강삼재의원의 주장이 제기된 후, YS는 지금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배드민턴 모임에 나가지 않는 등 외출도 삼가고, 전화도 받지 않은채 두문불출하고 있다. 상도동 비서진과 대변인격인 박종웅의원도 일체의 언급을 피한 채,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고, YS 자택으로 가는 통로에는 경호원들이 출입자들을 일일이 체크하며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新) 가택연금' 신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야 어떨지 몰라도 YS에게는 야당의원과 당대표 시절 늘 있어왔던 일로 감회가 새로울지도 모르겠다. 유신체제 시절,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야당총재직과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1980년 5월에서 1981년 4월까지의 1차에 이어, 1982년 5월에서 1983년 5월까지 2차 가택연금을 당했다. 또 신군부가 정치활동을 금지하자 YS는 기록적인 23일 단식투쟁으로 정면돌파했다. 당시의 YS의 단식은 뿔뿔이 흩어져 숨죽이고 있던 반독재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탄압받는 민중과 민주화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 때의 YS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행여 그가 마당에라도 나와 있으면, 그의 안위가 걱정되어 주변을 서성이던 수 많은 지지자들과 주민들이 눈물과 갈채를 보냈고, TV뉴스를 통해 방영되는 그의 모습에 국민들은 탄식과 한숨으로 지었다. 그리고 1차 가택연금이 풀린 직후, 1981년 6월에는 그를 지지하는 '민주산악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그의 명언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요즈음 "차떼기로 닭을 먹읍시다"며 어려운 축산 농가를 돕자는 의미에서 '닭먹기 운동'을 벌이는 '열린우리당원'들과 '정동영의장'을 보면서, 문득 대한민국의 개혁과 민주주의는 '닭'으로부터 시작되고 얻어지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만 헛웃음을 웃는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의 이 순수한 마음을 절대 잊지 말기를 기원한다 -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YS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어떤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당당하게 말했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YS가 한나라당과 자민련 그리고 노태우, 전두환, 김종필과 함께 야합해서 삼당 합당을 했어도 자신의 말처럼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 간 것이"라고 이해하려 애썼다. 또 일부 국민들은 오히려 그의 그런 용기와 대통령 당선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9천만원도 아니고, 9억도 아닌, 900억이 넘는 돈을 강삼재에게 넘겨준 사람이 바로 YS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그런데도 YS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YS는 그동안 "대통령이 된 후 정치자금을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공언해왔기 때문에 어떤 성격이든 돈을 받은 행위에 대해 스스로 `고백'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YS의 침묵은 국민들로부터 절대로 용납되거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사건은 '안풍' 사건의 정인봉 변호사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 당시 김영삼 전대통령이 1억원짜리 수표로 강삼재 의원에게 직접 건네준 것으로 알고 있다" 는 인터뷰를 해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 10여일의 고민 끝에 스스로 역사적 진실의 결단을 내렸다는 강삼재의원이 검찰에서 "김영삼대통령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증언함으로써 대전환을 맞고 있다.
- 덕분에 한나라당은 안기부자금이 아니라 YS에게서 받은 돈으로 선거를 치렀으니 관건선거와 떼도둑의 오명을 벗었다는 성명을 내었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전형적인 물타기수법'이라며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
그러나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은 "안풍자금은 안기부 예산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무관하며 자신이 이 돈을 만들어서 직접 당에 전달했다"며 다음 공판 때 이같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 진술서를 제출하겠다고 한다. 또 검찰은 검찰대로 계좌추적 등을 통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돈은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것이지만 안기부 예산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다. YS와 강 의원, 검찰의 삼각구도로 마치 어느 TV의 진실게임처럼 전개되는 묘한 양상으로 민생문제와 10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만 개입되지 않았다면, 아니 남의 나라 이야기라면, 호기심을 가지고 게임처럼 즐길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1997년 11월 이전에는 정치자금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이 돈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겠다. 또 구체적인 사용내역에 대해선 보존연한이 지났기 때문에 당에 보관할 의무도 없을 뿐더러 이미 파기시켰을 것이어서 사법부를 더욱 더 당혹스럽게 하고 있고 3년을 끌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주요 증인들이 무소불위의 국회의원과 거대 야당의 당직자인 이유도 크지만 말이다.
이제 3월 12일 YS의 소환일자가 잡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의 진실규명의 전말이 YS에게 달려있다고 하겠다. YS는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가더라도 끝까지 침묵하거나 '단순한 정치자금'이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공소시효가 지난 정치자금이기 때문에 YS 자신을 비롯한 강삼재..등등 개개인 모두는 사법적 처리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고 '떼도둑당'이라는 한나라당의 꼬리표도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풍사건의 진실'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을 것이고, 국민들 가슴에 큰 불신과 의혹을 주어 개혁에로의 큰 장애가 될 것이다. 또 '절대로 돈 받지 않겠다'던 YS의 위신과 국민적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며, 국민들은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존경할 수 없는 대통령을 가진 치명적인 아픔을 다시한번 느껴야 할 것이다.
사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YS는 그를 지지해 온 민주화 세력과 국민, 그리고 역사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다. - 물론 YS는 DJ와 더불어 노무현 대통령을 꽃피게 한 토양이다. 마흔두살의 노무현 대통령을 정치권에 입문시킨 사람이 바로 YS이고 1990년 3당합당으로 할말을 하는 노무현의원을 만들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1990년 '군부세력과의 야합, 민주화 세력의 변절'이라는 논란 속에 노태우·김종필 세력과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되기까지도 그렇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정치군인인 하나회를 해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등의 업적도 세웠지만, 굵직한 국책들의 실패와 아들(김현철) 문제,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통령으로 주변인들을 부끄럽게 만든 '오명의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에도, 그의 파행은 계속되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햇볕정책으로 살려가는 남북관계 진전에 대해 "김정일이 회장이라면, DJ는 전무에 불과하다. 북한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며 '평가절하'하는가 하면 "이제 DJ 에게는 희망이 없다" 며 독설을 퍼부었다.
또 2002년 대선을 앞둔 11월 20일 아침, 일본 닛케이신문에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서 "이회창후보가 당선하지 않겠느냐"는 인터뷰를 해서 민주화 세력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또 국민통합21 정몽준후보와의 후보단일화 작업이 추진되는 시점의 중요한 기로에 있는 '노무현후보' 에게 큰 대미지를 주었고, 대한민국의 진정한 개혁 열망하는 많은 젊은이들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YS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역사와 국민 앞에 지난 오명을 벗고, 독재와 맞서 당당하게 정면돌파 하던 젊은 시절의 패기있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번 '안풍' 사건에의 진실 고백은 대한민국 정치개혁의 장을 새로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될만큼 폭팔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소시효는 지났다 하더라도 YS의 증언여부에 따라 국민은 진실을 알 수 있고, 지나간 검은 돈정치, 공작정치를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YS는 이제 우리 가슴에 떳떳하고 당당한 자랑스런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진심으로 YS가 진정한 용기를 내어 '안풍' 사건의 전모와 진실을 명명백백 밝히고, 역사와 국민 앞에 이해를 구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한민국 정치발전의 큰 밑돌이 되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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