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당신이 물러나야 나라가 산다”
김광일 변호사는 1980년대 부산에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으며 그를 정치에 입문케한 주역이다<편집자주>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3개월여 만에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막말을 하더니, 8개월도 채 안되어 대통령직의 재신임을 묻겠다는 폭탄선언을 해 나라 안팎이 모두 놀라고 있다. 국민 협박용이냐 국면돌파용 승부수냐를 놓고 논란도 분분하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추측과 예상이 난무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노 대통령 특유의‘깽판 정치’라고 생각한다.“남북문제만 잘 되면 다른 것은 모두 깽판쳐도 좋다”고 막말을 하더니, 드디어는 헌법 파괴적인 재신임 묻기로 또다시‘깽판’을 벌이는 것인가.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가 현실인데도 타협의 정치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행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가결이나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을 ‘발목잡기’라고 덮어씌우며 대의기관인 국회의 헌법상 권한마저 부정할 때 누가 그를 민주주의자라 인정할 것인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여당을 취임 7개월 만에 떠난 그를 책임 있는 정당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연유로 해서 사회의 가치관은 전도되고, 국론은 분열되고, 국민의 불안과 원성은 높아만 갔다.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는다고 꾀를 낸다는 것이 ‘재신임 묻기’일 터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진심으로 국민의 뜻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심사숙고하여 상식있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재신임의 일정과 방법을 명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첫날 기자회견에선 측근의 비리 때문에 재신임을 묻겠다고 하더니, 다음날엔 “야당의 발목잡기로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며 마치 야당 때문에 재신임을 묻겠다는 듯이 말을 바꾸었고 침울하던 청와대와 내각의 표정이 바뀌었다. 신당의 반대도 찬성으로 돌아섰다. 노사모 대표라는 사람이 스스로 밝혔듯 ‘홍위병’들이 다시 뭉칠 기세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깊은 생각없이 저지른 돌출행동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암수 같기도 하다.‘재신임’ 선언은 ‘깽판 정치’
노 대통령은 깜짝수에 능했다. 상식을 뒤엎는 호남 몰표에 의한 영남 후보가 되었고, 지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기사회생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그런 깜짝수가 통했을지 몰라도 대통령으로서는 그런 수단에 의존하는 정치행태를 되풀이 해선 안된다. 무엇보다도 그런 수법이 통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끝내 재신임 투표가 진행되어 비판 언론을 탄압하고, 어용언론과 홍위병을 총동원하여 국가 위기감과 국민불안감을 최대한 조성한다 하더라도 현명한 국민은 쉽사리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그가 지방선거 때 부산, 울산, 경남 3개 시·도지사 중 하나라도 못 건지면 대통령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또 설령 재신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가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비판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고 야당의 저항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 국민 불안은 가중되고, 경제는 위축되고, 국가신인도는 한없이 추락하지 않겠는가.
나라도 살리고 노 대통령도 사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면 그 유일한 길은 노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사고(思考)와 정치행태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뿐이다. 자신과 측근들이 저지른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는 것이 순서다. 나아가 국민의 비판과 충고에 귀를 기울이며 경제회생과 국민갈등 조정에 진력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헌정의 중단을 바라지 않는 국민들은 ‘재신임 묻기’ 자체를 말릴 것이고, 필요하다면 흔쾌히 지지표도 던질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고 그 책임은 막중하다. 그러한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통령의 권위가 어느 정도 유지될 때이며,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의 참된 권위는 국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잃고, 한번 권위를 상실하면 권위의 회복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민정부 두 대통령의 집권말기에서 익히 경험한 바이다.
설사 이런 방법으로 재신임을 받은들 집권 초기부터 아예 ‘양쪽다리 레임덕’에 빠진 그가 몇 발자국이나 더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추락된 권위를 가지고 아직도 남은 4년 4개월의 긴 임기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더 이상 국민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노 대통령은 즉각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가 전적으로 상실됐음을 자인한 것이 ‘재신임 묻기’가 아닌가.
대통령이 재신임을 못 받으면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을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혼란을 예방하고,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재신임 같은 헌법에도 없는 혁명적 정치 장난을 중지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다. 이미 대통령직 수행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즉각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헌법에 따라 보궐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 국무총리가 직무대행자가 되어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하면서 보궐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궐선거에서 국민들은 더욱 신중한 선택을 하지 않겠는가.
김광일 변호사(전 대통령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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