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 사변(동란) 전 후의 이야기(12) / 화곡
-1945년 부터 1957년 까지의 경험 이야기-
다음 날 9월 마지막 날 오후 동네 아저씨들이 이집 저집 다니며 알려 왔다.
내일 물치 장거리에 모두 국방군을 환영하러 나간다고 하였다.
준비물은 태극기인데 네모난 흰 종이 한 가운데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동그라미 가운데 선을 그리고 위에는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 동그라미 주변 네 모퉁이에 비스듬이 검정 색으로 세 개씩 선을 그려서 손에 들 수 있는 깃발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농사만 짓는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등 많은 분들은 글자를 배우지 못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문맹인 분들이 시골 농촌 동네 마다 참으로 많으셨다.
나에게 만들어 보라고 하여 내가 대충의 얘기를 듣고 할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지켜 보시는 가운데 태극기를 생전 처음 그리는데 방바닥에 종이를 깔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뚜가리(나무로 만든 투박한 밥 그릇)를 엎어 놓고 연필로 사발 언저리를 따라 동그라미를 커다랗게 그리고 대충들은 말을 근거로 태극기를 그렸는데 제일 가관인 것은 원 한가운데는 원의 중심점을 지나는 선이 직선 이었고 위에는 붉은색 아래는 푸른색 이런 정도였다.
동네 누나들이 물감을 타고 나는 그리고....
그런 나를 내려다 보며 기대하시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 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기가 짝이 없는 그런 태극기였다.
나는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이 도덕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어린 학생들이 그린 태극기를 보았다.
규격에 맞게 원칙대로 법도에 맞게 그린 태극기를 유심히 보았다.
아주 정교히 잘 그린 것을 보고 내가 그리던 그때를 생각하고 실소를 금치 못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도 교사에게 제출한, 제일 제작을 잘못한 태극기도 그때의 나의 태극기에 비교하면 최고로 우수한 태극기라고 할만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태극기가 아닌 태극기를 그린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린 태극기를 보고 대청화곡이 태극기를 잘 그린다 하면서 너도 나도 태극기를 그려 달라는 바람에 신바람이 나서 수도 없이 많은 태극기를 그려 드렸다.
태극기의 음양, 사괘는 처음부터 모르고 그저 네 귀퉁이에 짤막한 굵고 검은줄 세 개씩을 그려 가운데 원을 둘러싸고... 배치 등 규격이 한군데도 맞지 않은 앞면만 그린 그런 태극기 였다.
내가 지금까지 평생토록 가장 자랑하고 사랑하는 태극기를 열 살짜리 초등학교 3학년생인 그때 처음으로 그려 본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바로 그 태극기였다.
나는 갑자기 태극기 그리는 전문가(?)가 된 셈 이다.
한편 생각하면 그때의 태극기는 참으로 정성이 가득 담긴 참으로 소중한 의미있는 태극기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튼날 10월 1일은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내 고향 양양을 해방시킨 날이다.
그날은 아주 쾌청한 날이었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아침 일찍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물치 장거리 터에 내려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손과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내려갔다.
학교 운동회 날의 신이나는 아침 등교길 보다 더 신나는 걸음걸이들이었다.
양양 읍내 쪽 낙산사 어귀에서부터 길 양쪽으로 이 고을 저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모두들 마음이 들떠서 군대 행렬이 오지 않았는데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덩실 덩실 춤들을 추고 계셨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지금의 물치 농협앞 즈음되는 곳에 모여 있었다.
나에게 증조모 뻘 되시는 일가의 좀 젊으신 쉴집(그댁 택호) 할머니는 벌써부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시며 춤을 추시며 들떠 계셨다.
8.15 해방이 되고 얼마 뒤 그 할머니의 아드님 영배 진배 갑배 세 형제분이 모두 월남하여 국방군 헌병이 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동네에서 비밀리에 다 아는 사실이다.
드디어 국방군 이 저기 온다고 술렁 거리 더니 만 맨 처음 앞에 오는 군인 트럭 위에 나팔을 불고 큰 북을 쿵쿵치는 군악대 차가 나팔 소리도 우렁차게 천천히 들어 오는데 나는 그때의 감격스러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나팔을 부는 군악대 아저씨의 번쩍번쩍하는 철모가 아주 멋있게 보였다.
그리고 우렁찬 군가가 온천지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 한다,
원한 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하늘을 찌르는 기개, 환영 나온 바지저고리 차림의 소박한 촌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우리 국군의 위용!
북진 하면서 부르는 국방군의 군가 따라 어느덧 우리들도 그 가사를 금방 익히고 그 길고도 긴 진군 차량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 라고 외치며 함께 부르던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 군가!
그 만세 소리!
그 환영!
자유의 감격!
암울한 공산 치하에서의 해방!
8. 15 광복 때는 이 보다 더 했다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어른들만 쳐다보고 그저 좋아 하기만 했으나 어느 정도 철이 든 뒤에도 생각해 보면 이 때의 감격은 내 일생 중, 아니 평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환희의 장면 이었다.
아마 암울했던 공산치하에서 살다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따뜻한 품에 포근히 안긴다는 감회 때문 이었으리라.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 이후 내가 62년 논산 육군 훈련소에 입대한 뒤에도, 지금까지 군가와 행진곡만 나오면 내 몸은 기쁨과 용솟음치는 애국의 기상이 몸 안에서 서서히 일어남을 느낀다.
북진하는 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 간혹 여러 가지 물건을 던져 주는데 태극기를 흔들던 내 가슴 앞으로 종이 뭉치가 날아와 얼떨결에 받아 뜯어 보니 화랑 담배 가 한 뭉치였다.
담배를 피우시는 내 할머니는 나중에 피워 보시고 맛이 좋다고 하셨다.
동네 아저씨들에게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셨다.
쉴집 할머니는 차량이 지나갈 때 마다 가운데 길 쪽으로 나가시면서 춤을 추시며 연신 ‘어서 오너라!’ ‘어서 오너라! 자꾸 자꾸 오너라!’ 하시면서 덩실 덩실 춤추시는데 행사가 끝날 때 까지 당신 정신이 아니실 정도로 환영하셨다.
그러시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치일 뻔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머니는 남쪽에 가서 국방군이 되신 세 아드님을 기다리시는 열정은 우리어머니들의 모성 때문 이셨으리라.
머일 할아버지도 희색이 만면하셔서 이상하게 매 달고 다니시는 상투를 이리저리 흔들으시면서 기뻐하셨다.
온 고을 동해안 우리 지방의 갑작스런 대 축제였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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