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탈북자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이 밤, 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너의 생각이 간절해 침대를 박차고 컴퓨터 앞에 않아 이글을 쓴다.
지금 금강산에서는 28년 전 김정일이 납치했던 김영남 씨와 남한에 있는 가족들의 상봉이 눈물겹게 안겨온단다. 순간이라도 아차, 말 한마디 잘못하면 면회가 당장 취소될 듯한 위압감 때문일까? 그 눈물겨운 상봉시간들이 아슬아슬하게만 느껴지더구나. 만약 김영남 씨가 “내가 납치된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고향에 한번이라도 가고 싶다”라는 진심의 말이 나오면 면회는 취소될 뿐더러 그 이후 김영남 씨의 가족은 곧바로 정치범 수용소행이기 때문이란다. 또 김영남 씨의 어머니가 “이 납치범들아! 내 아들을 고향에 데려 가겠다”라는 말만 튀어 나와도 역시 그 면회는 당장 취소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란다. 북한이라는 거대 감옥 속의 금강산 면회소에서 간수들의 감시 하에 이루어지는 만남은 나에게 많은 상념을 안겨주었다.
네가 보고 싶다. 사무치게 보고 싶다. 28년만에 아들을 끌어안은 최계월 어머님만큼은 아닐지라도 너의 볼을 만지고 싶다. 너를 안아보고 싶다. 며칠 후면 7월 4일이다. 이날은 네가 반드시 잃지 말아야 할 날이기도 하단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1997년 7월 4일 너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이란다. 이 날은 아버지의 생일날이기도 하고, 남과 북이 7·4공동성명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며 미국의 독립기념일이기도 한 매우 의미 있고 슬픈 날이란다.
4살 난 너를 꼭 껴않고 눈물을 흘리던 그날, 내가 어디로 떠나는지도 모르는 너의 외할머니가 “걱정 말고 어서 떠날 길을 가게나!”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선연하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너무도 위험한 길이었지만 이 아버지는 너에게 약속했다. “여섯 달 전에 꼭 돌아온다고….”
하지만 천진한 너의 볼에 흘린 눈물이 너와의 이별점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이 아버지가 작심하고 북-중 국경을 넘은 것은 식량 구입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러나 북-중국경의 삼엄한 경비로 말미암아 그 목적을 6개월 후에야 달성할 수 있었단다. 이것이 더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노동당 규약에는 6개월간 당생활(주별 생활총화, 당조직의 분공, 정치학습)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자동출당하게 되어 있다. 출당이라는 자체는 곧 반당행위이며, 엄격한 처벌이 가해진단다. 더욱이 그동안 행적을 조사 하면 중국에 갔었다는 것이 들통 날 것은 당연했단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정은 풍지 박살이 날 것이었다. 이 아버지는 정치범 수용소행이요, 또 너의 어머니, 너에게까지 반동이라는 정치적 누명이 씌워져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은 불 보듯 명백했단다.
오랜 고민 끝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북한에 인권개선과 민주화가 이뤄져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가리라 결심했단다. 따라서 그동안 벌어 놓았던 달러를 너의 어머니에게 전달되도록 지인에게 부탁하고, 이 아비는 북한 인권개선과 민주화의 길을 택했단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네가 보고 싶어서 한때는 술로 가슴속에 그리움을 달래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너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아비가 민주화된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아비는 두 번째를 택하련다. 아비는 여건상 너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힘들다. 무엇보다 생이별을 해결하는 근원적 방법은 아비가 자유인으로 평양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남 씨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고, 아버지의 산소에 술 한잔 부어드리는 것과 나의 이 결심이 맞닿아 있음을 믿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김영남 씨에게 돌려주는 것과 너와의 자유로운 만남이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에게 당장 달려가지 못하는 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 ‘자유’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눈물과 열정, 인내와 비통함, 그리고 양보할 수 없는 희망을 담아 준비하고 있으니. 그날까지 이 아비를 원망하며 살아만 있어다오. 부디 살아만 있어다오. 내 생의 나머지는 너의 것이니.
김영남 씨가 고향 군산의 선유도로 돌아오고, 이 아비가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는 날에야 비로소 이 야만은 끝날 것이니, 아들아 살아만 있어다오.
이주일 (탈북인권운동가, 2000년 입국)
599042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