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노무현은 한나라당의 허점을 노렸다
바둑으로보는정국평
바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깨넘어 보는 훈수는 꽤 강한 것 같은데 막상 실전을 치르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남들이 써놓은 관전평이나 기보는 재미있게 잘 읽어내려 가지만 막상 바둑판을 앞에 두고 대국하려면 나도 모르게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수준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묘수풀이는 곧잘 해내지만 실전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속수를 남발하다가 쪽박차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면에서 바둑과 정치는 매우 유사하다. 바둑은 상대방과 1:1로 붙는다는 점에서 아주 단선적이지만 바둑판에서 쓰이는 용어나 전략의 개념은 정치판에서도 훌륭히 통한다.
바둑판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중의 하나가 바로 "선착의 효"라는 것이 있다. 흑돌을 집으면 백에 대하여 덤이 있다. 그러나 판세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 내가 세력이나 실리 중 어느 판을 취할 것인가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포석단계에서 백돌을 쥔 상대방은 내가 펼쳐나가려는 판세전략에 끌려올 수 밖에 없다. 내가 실리를 취하는 전략을 택했는데 백돌을 쥔 상대방도 자기도 실리가 좋다고 무작정 고집스럽게 우긴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매우 높다.
거꾸로 내가 세력작전을 펼치려는데 백돌도 세력이 좋답시고 무작정 돌만 벌려놓는다면 이건 흑돌이 거저 먹는 게임과 마찬가지다. 판을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꾸려갈 수 있다는 것...이것이 바로 흑돌의 권리이며 선착의 효이며...아울러 흑돌에게 덤이 주어지는 근거이기도 하다.
노무현을 바둑스타일로 표현하면 세력을 중시하는 타잎이다. 실리를 중시하는 타입은 아니다. 실리를 좇아서 살아왔다면 지금 대통령 자리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잘해보았자 지금의 이부영 수준의 정치적 비중만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눈앞의 이익이나 자기계산에 약삭빠른 정치인은 아니다. 노무현이 내세우는 여러 정치적 모토는 그가 얼마나 멀리, 넓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전형적인 세력스타일이다. 정치의 세력은 바로 명분이다. 명분을 쌓고 또 쌓아놓으면 언젠가 아주 무시무시한 뚝심을 발휘하게 된다.
잔잔하게 귀퉁이 돌 몇개 잡아서 열댓집 정도 만들고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중원을 싸바른 채 통째로 먹겠다는 전략을 펼쳐왔다. 지금까지의 정치역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특검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한나라당을 믿는다"고 도망못가게 못질을 하면서 수용한 것도 노무현식 세력정치의 일환이다. 5년 임기의 포석단계에서 가장 큰 갈림길이 될 특검수용 여부에 대해서 노무현은 그 스타일대로 세력을 택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울며 겨자먹기로 실리 전략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같이 세력다툼을 하면 선착의 효가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흑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실리전략을 취하는 것 만이 한나라당의 유일한 길이다. 유일한 희망은 노무현의 세력진영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구멍을 만들어야만 할 판이다.
짐짓 한나라당측 손을 들어주듯이 특검을 수용했다. 이것으로 일단 노무현은 큰 명분을 하나 쌓아놓았다. 국회를 존중하겠다는 그동안의 약속도 지킨 것이고 야당과 상생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약속도 지킨 것이며 아울러 대북관계도 보다 투명하게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한나라당은 무조건 실리 전략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 판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명분은 노무현 것이다.
여기에 한나라당의 고민이 있다. 취할 수 있는 실리란 무엇인가 ? 임동원이 잡아넣고 박지원을 집어넣는 것이 과연 실리인가 ? 김대중 전대통령의 업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폄하시키는 것이 과연 실리인가 ? 공개적으로 밝혀지면 아주 곤란한 대북협상 루트를 만천하게 까발리게 되면 과연 실리를 취한 것일까 ? 그게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의 시각에서 유일하게 평가할 수 있는 실리는 바로 노무현과 김대중 진영의 갈등 증폭이나 세력 분열이다. 동교동계로 불리는 민주당내 친김대중 세력을 노무현진영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 최소한 내년 총선때까지는 분열시켜야만 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정치적 생명이 연장된다. 상대진영 분열에 실패하면 거꾸로 자기들이 분열한다. 정치의 속성이다. 그 고리로 동원한 것이 바로 이번 특검이다.
특검을 수용해서 한나라당은 당황하고 있다
문제는 이번 특검대상으로 등장한 남북관계에 대해서 한나라당이 명분을 잡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깊이 파헤치면 파헤칠 수록 여론이나 명분은 한나라당에서 멀어진다. 특검자체가 올바른 남북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검 자체가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라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대북교섭 자체를 하나의 범법행위로 인식하는 선입견이 아직도 그들 뇌리에 굳게 박혀있다.
노무현은 이러한 판세를 충분히 읽었을 것이다. 특검 거부는 당장에 민주당내 김대중세력과 일견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내년 총선때까지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 올무 역할을 할 것이다. 수구언론의 저 끝없는 물어뜯기, 할퀴기식 마구잡이 뭇매질도 예상된다. 특검을 거부하는 순간 한나라당은 분열을 멈추고 단결한다. 공통의 정치적 타겟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미 과반수를 훨씬 넘게 점유하고 있는 국회도 그들에게 아주 좋은 투쟁의지를 불태우게 할 것이다.
특검수용은, 물론 몇가지 전제를 깔아서 수용했지만, 결국 한나라당이 단결할 수 있는 명분을 먼저 빼앗은 것이다. 명분은 항상 노무현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아주 희귀하게 볼 수 있는 명분이나 원칙...그러한 명분과 원칙을 노무현이 또 한번 챙긴 것이다. 한나라당은 특검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강하게만 밀어붙일 수 없다. 밀어붙이면 붙일 수록 여론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노무현의 특검수용 결단이 내려지기 까지 한나라당이 보여준 아주 강경한 태도는, 거꾸로 노무현이 특검을 거부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냄새를 풍긴 것이 아닐까 ?
한나라당 입장에서 최선의 경우는 바로 노무현이 특검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면 다시 한 번 똘똘 뭉칠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내부의 분열도 노무현 특검거부 비상시국을 핑계로 잠재울 수 있다. 노무현=김대중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다시 한 번 울궈먹을 수 있다. 노무현의 개혁드라이브에 흠집을 내면서 내년 총선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는 노무현이 특검을 전격 수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거부할 줄 알고, 아니 일부고 거부해주기 바라면서 강경하게 나갔는데 덜컥 수용해버리면 아주 골때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단꿈은 당장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보다 훨씬 더 최악의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이 특검을 수용하면서 "한나라당을 믿는다"라고 침을 발라놓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힘에 눌려서 어쩔 수 없이 특검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명분을 빼앗으면서 특검을 수용하고 더불어서 한나라당이 발뺌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못질하는 상황인 것이다.
아직은 포석단계이다. 내년 총선이후에야 중반단계가 진행된다. 노무현은 세력중심의 정치인이다. 특검수용도 그러한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다음은 한나라당이 응수할 차례이다. 어차피 그쪽은 실리취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세력을 위한 명분은 이미 노무현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그 실리라는 것도 실은 자기 발목을 옭아매는 실리인 것이다. 노무현식 정치바둑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해보자. 한 수 한 수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사족) 세력중심의 바둑에서는 흔히 사석작전이 동원된다. 상대방 돌의 외곽을 철저하게 싸바르기 위해서 상대방 진영에 약간의 미끼를 던지거나 혹은 상대방이 탐을 내고 있는 돌들을 적당하게 짤라주면서 외곽에 아주 두터운 벽을 쌓는 것이다. 민주당은 과연 노무현에게 사석이 될 것인가 ? 몇마리 짤라주고 조그맣게 세력을 쌓을까 아니면 큰 덩치를 짤라주고 아예 중원을 도배할까 ? 하는 질문도 해가면서 노무현식 정치바둑을 감상하면 아주 재미가 있을 것이다.
세력바둑의 위험성은..그 쌓은 벽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세력을 일단 쌓기는 쉽되 세력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현대바둑이 실리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세력 70%, 실리 30% 라고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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