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속속 들어나는 30만 정치범 수용소 실상=
북한14호 정치범수용소 1곳에만 1500명총살.1990년
공포심 조장을 위한 목적에서 정기적 공개처형
수용소안 보위원들의 기분이 나쁘면 죽음을 당할 확률도 높아져..
탈출자 가족은 나무에 팔을 꺽어 매달아 죽게 방치 .
도주하다 붙잡히면 공개총살
한 가족의 오누이간, 母子간에 성관 계를 맺는 등 가족 윤리가 파괴되는 일이 종종 발생
여성 수감자들 수용소를 운영하는 안전원들의 性的 노리개로 학대...
이것은 한국판 아우슈비추 입니다. 훗날 통일이 된후 이 사실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지 두렵습니다. 이것은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나치의 만행에 버금가는 한민족이 저지른 인류에대한 만행입니다.
남한에서는 월드컵을 개최하여 전세계의 인류와 함께 잔치를 벌렸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한쪽에선 최악의 인권말살 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이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속속 들어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이들의 인권문제는 왜 북한에 거론도 못합니까?
그러고도 인권 대통령입니까 ?
죽을사람은 죽어도 나머지는 태평성대를 누리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요?
지금 김대중 정부는 북한의 비위 맞추기로 이들의 인권문제는 거론도 못하고 오히려 북한을 자극 한다는 이유로 탈북자들의 입을 막고 기자회견 조차 막고 있습니다.
같은 동포인 우리가 먼저 북한의 인권을 들고 나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의 지성인들이 아니라 불란서의 지성인들이 먼저 북한의 인권 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으며 북한의 요청에도 불란서는 북한의 인권을 문제삼아 북한과의 수교를 보류하고 있습니다.
남북 관계 진전도 중요하지만 탈북자와의 기자회견도 하고 북한의 끔찍한 인권탄압을 국제사회에 널리알려 북한의 인권상황을 전인류가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북한 당국에게 주지시키고 압력을 넣는 것이 우리 정부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요.?
세계인이 다 아는 북한의 실상을 남한사람들만 잘 모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속속 들어나는 30만 정치범 수용소 실상-.
14호 정치囚 수용소의 일과
05:00 기상 06:00시까지 - 식사
06:30 - 대열점검
07:00 - 작업장 진출. 몸수색(입출갱시 폭약 반출여부 확인 위한 작업). 주 1회씩 여죄연루 여부 관련 자술서 작성
08:00~12:00 - 오전작업
12:00~12:30 - 점심
12:30~20:00 - 오후작업
20:00 - 작업종료
하루 평균 12시간 노동을 하는데, 작업계획에 따른 작업량이 달성되지 않으면 보통 23:00 까지 작업(하루 평균 15시간 노동)
●14호 수용소는 土, 日요일이 없고 연간 하루(1월1일)만 휴무. 규정에는 김일성·김정일 탄신일이 휴무로 되어 있으나 이날도 노동을 한다. ●14호 수용소의 경우 생산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반면, 18호의 경우 생산계획이 있어 이 작업량을 중요하게 여긴다. 18호 수용소 탄광의 경우 하루 5m 이상 굴진을 해야 한다. ●18호 수용소의 경우 일과는 14호와 비슷하나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1)월요일 아침에 직맹생활 총화(조직별로 모여서 회의)
2)토요일에 덕성학습(김일성, 김정일의 덕성, 인덕정치, 김일성 부자는 위대한 분이라는 내용 교육)
3)휴일이 김정일 생일(2월16일), 김일성 생일(4월15일), 당 창건일(10월10일), 1월1일 등 4일
한번 끌려가면 시체마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북한에서는 수용소를 관리소라고 부른다. 한 끼에 강냉이 20~30알과 소금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하루 15시간씩 탄광에서, 작업장에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곳. 보위원들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쏘아 죽이고 때려 죽이고, 굶겨 죽이고…. 그 시체를 짐승처럼 끌고가 묻어버리는 곳. 그리하여 죽음이 일상화된 곳. 무슨 죽을 죄를 지어 끌려가면 그나마 억울 함이 덜할 것이다. 그저 지주의 아들, 북송 교포, 김일성 사진 훼손 등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처구니없는 죄목이 대부분이다. 죄를 지은 당사자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 가족은 또 무슨 죄가 있다고 2대, 3대 젖 먹이 어린이까지 끌어가 목숨을 잃게 만드는가. 『반동의 씨앗들은 3대를 멸종시키라 』는 金日成(김일성)과 金正日(김정일)의 교시가 진리로 숭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정치囚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상황이 열악하다고 알려진 제14호 및 18호 수용소를 탈출하여 귀순한 金龍(김용 )씨의 증언..
수감자들의 한 끼 양식은 통강냉이 20∼ 30알과 배추 잎이 둥둥뜬 소금국이 전부입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힘을 쓸 수가 없어요. 갱도에서 100m를 걸어 들어가는데 15분도 더 걸렸고, 삽질 한 번 하고 나면 하늘이 노래져 헉헉거리며 숨을 쉬어야 했습니다. 노동 생산성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탄광에서는 작업 목표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들어도 보위원이 지시한 작업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면 「공화국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무진2갱 지역에서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곤 하마처럼 입을 벌린 坑口(갱구)와 그 옆 수감자들의 주거지인 다 쓰러져가는 막사 한 棟(동), 식당 겸 세면장 한 동, 제재소 , 그리고 종합 권양기실이 전부였다(아래 그림 참조). 막사는 6칸의 내무반으로 나뉘 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방에는 52∼53명의 남자 수감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김용씨 는 무진2갱 지역의 수감자를 300여 명 정도 로 기억했다. 수감자들은 굴진조, 준비굴진 , 채탄공, 선로조, 전차운전조, 제재조, 동 발공 등의 임무로 나뉘었다.
1993년 10월 무렵의 일이다. 갱구에서 산중 턱을 따라 석탄을 실어나르는 전찻길이 나 있었다. 그 주위에도 밤나무가 많아 전차 선로에 잘 익은 밤알들이 떨어져 있었다. 하루는 전차(석탄 운반차) 운전공인 김철민 (당시 나이 54세 정도. 평북 대관 출신)이 석탄을 운반하고 坑으로 돌아오던 중 전찻 길에 떨어져 있는 밤알을 발견했다. 너무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힌 김철민은 전찻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밤알을 주웠다. 그때 갑자기 『야 이 새끼야, 그 자리에 섯』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坑 안에서 동발목(갱도 를 받치는 나무 기둥)을 나르고 있었던 김 용씨는 고함소리에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당시 김용씨 일행을 감독하던 보위원은 성 격이 포악해서 수감자들이 「오빠시」(산 속에 살고 있는 야생벌로서 맹독성의 침을 갖고 있는 독종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밤을 줍는데 정신이 팔린 김철민은 오빠시가 자기를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뛰어간 보위원은 김철민의 허리를 구둣발로 냅다 걷어차 쓰러뜨리고는 사 정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퍽퍽 튀었다. 마구잡 이식 구타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보위 원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철커덕 장전을 했다.
『이 새끼는 사회에 있을 때도 당과 인민에 대한 해독분자였는데, 여기 와서도 자기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반항을 하다니. 이런 해독분자 새끼는 죽어도 싸다』 이렇게 외치고는 김철민의 머리를 전차 레 일 위에 구둣발로 내려 밟은 채 이마에 총 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망치로 귓전 을 때리는 듯한 총소리와 함께 김철민의 입과 머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구쳐 나왔다 . 보위원은 감독(수감자 중 대표로 정한 사람. 일종의 보위원 프락치. 이름 기억 못함 )에게 『이 새끼를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 감독이 달려가 피를 쏟는 김철민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보위원이 『이 새끼 , 해독분자를 동정하나? 너도 이 꼴이 되고 싶나? 그냥 끌고가』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감독은 머리에 총을 맞고 시체가 된 김철민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면서 전차 선로를 따라 내려갔다. 김철민의 머리가 선로의 침목에 닿을 때마다 털컥털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철민의 손에는 그때까지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알의 밤알이 으스러지게 잡혀 있었다.
김용씨는 짐승 시체를 끌고 가듯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도 인간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며 치를 떨었다. 다른 수감자들도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죽 일 놈들, 개만도 못한 놈들』 하며 오한이 난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시 정황에 대한 김용씨의 증언.
『수용소는 無法 지대입니다. 수감자들이 무슨 뚜렷한 죄를 지어 합법적인 절차를 거 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담당 보위원의 기분에 따라 죽이는 겁니다. 보위원들 기분이 나쁘면 죽음을 당할 확률도 높아지지요. 때문에 수감자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머 리털이 곤두선 채 살아야 합니다. 수용소에서는 자신을 담당하는 보위원의 명령을 우선적으로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데 두 명의 보위원이 함께 불러 일을 시킬 경우 담당 보위원의 지시를 먼저 들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다른 보위원은 「이 새끼 내가 부르면 낯가림을 한다」면서 쏴 죽이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런 진술은 『보위원 기분 내키는 대로 쏴 죽인다』는 안명철씨(22호 관리소 경비원 출신 귀순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김용씨도 보위원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을 소개했다. 그가 무진2갱 「지하 6편 도」(지상에서 여섯 번째 작업 갱도)에서 굴진공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1편도 는 보통 120m이기 때문에 지하 6편도는 72 0m의 땅 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인간성이 거의 메말랐기 때문에 한 내무반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던 동료 수감자가 죽어도 무감각하다고 한다. 죽은 자를 동정하다간 해독분자로 몰려 같은 꼴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씨 의 증언.
그는 같은 내무반에 수용됐던 농구선수 출신 수감자 갈리영씨의 죽음을 기억해 냈다 . 갈리영의 당시 나이는 57세 정도. 아버지가 지주였다는 이유로 끌려와 수용소 생활 을 하고 있었다. 농구선수로 활동할 때는 중거리슛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하루는 문제의 「오빠시」 보위원이 갱 내부를 순찰하다 늘 가지고 다니며 작업자들 을 때리거나 지시할 때 쓰는 소꼬리로 만든 채찍을 깜빡 잊고 坑에 놓고 나갔다. 너무 나 굶주렸던 갈리영씨는 이것을 몰래 숨긴 다음 물에 불려서 뜯어먹었다. 다음날 채찍을 잃어버린 오빠시는 수소문 끝에 갈리영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끌어내 『당과 인민에 대한 반항자』라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했다. 너무 많이 맞아 갈리영이 혼절하자 보위원은 감독에게 시켜 변소(별도의 건물로 된 것이 아니라 숲속에 구덩이를 파고 주위를 거적으로 가린 곳 )에서 회충을 한 마리 나뭇가지로 둘둘 말아가지고 와서는 『이 새끼야 이것도 고기 니까 처먹어라』 하면서 입 안에 마구 쑤셔 넣는 것이었다. 갈리영씨는 몸부림을 쳤지만 강제로 나무 막대기를 입안에 쑤셔넣는 바람에 입이 찢어져 피거품이 솟구쳐 나왔 다.
『갈리영은 그날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고 열이 나고 온몸이 퉁퉁 부어 올랐습니다. 제가 간호를 하느라 그의 머리를 무릎에 얹어 놓고 위로를 해주었어요. 그는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지주 아들이 무슨 죄인가. 아버지의 재산을 넘겨받은 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이런 고역을 치러야 하나」 하며 눈물을 흘리더군요』
수감자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기 때문에 몇대 맞으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 다. 결국 갈리영도 구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흘간 불덩이가 되어 끙끙거리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음이 일상화된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그저 「또 죽었구나」 하고는 질질 끌어다 아무 곳에 나 묻어버리지요. 만약 사람이 묻힌 곳이라는 표식을 남기거나 봉분을 만들었다간 처 벌당하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해서는 어떤 동정도 금물입니다』
『전차 운전공 김철민이 오빠시의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어떤 수감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김철민의 손에 쥐어졌던 그 밤알을 빼내서 먹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김철민은 죽어가면서도 밤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으스러지도록 꼭 쥔 채 죽었어요. 그 수감자는 김철민의 손가락을 펴려고 낑낑댔는데, 이 모습을 본 굴진조장 김재근이 「이 새끼야 너도 사람이냐?」 하면서 발길로 그 수감자를 걷어찼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런 짓을 다 했겠습니까』 수용소에서는 入所(입소) 당시 다 떨어진 죄수복을 내주고는 다시는 옷을 지급하지 않는다. 찢어지면 찢어진 대로 기워서 입어야 하는데, 오랜 기간 수감됐던 사람들은 완전히 옷이 해져 기울 자리도 없을 지경이 라고 한다. 갈리영이 죽었을 때 수감자들은 그의 옷을 서로 먼저 뺏으려고 치고 박는 싸움을 벌였을 정도라는 것이다. 한번은 소지품 검사를 하는 와중에 한 수감 자의 몸에서 신문지 조각이 발견되는 바람 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14 호 관리소에서는 수감자들에게 담배를 지급 하지 않기 때문에 야생의 쑥과 가랑잎을 잘 게 부숴서 말아 피운다고 한다. 담배를 말 아피우는 종이는 「여죄 연루」 자백을 기 록하라면서 가끔씩 종이를 나누어 주는데 이것을 몰래 잘라서 사용한다고 한다. 1994년의 일이다. 인민군 출신으로서 전차 선로조에서 일하던 변철우라는 수감자가 주머니 검사 과정에서 손바닥 만한 신문지 조각이 발견됐다. 아무리 맞아도 변철우는 신문 조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자백하지 않 았다.
『엄격하게 통제된 수용소 안에서 어떻게 신문 조각을 구해서 가지고 있었을까 지금도 의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결국 그는 탈출 기도, 도주 기도 혐의로 손을 뒷짐지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습니 다. 변철우는 이틀간 나무에 매달려 짐승같이 울부짖고 대소변을 흘리며 고통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 신문을 소지하면 심한 처벌을 하는 것일 까. 이런 의문에 대해 김용씨는 『수용소에 서는 신문을 단순히 종이로 생각하지 않고 수감자들이 정세파악을 하여 폭동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씨는 이처럼 잘못을 저지른 수감자들을 대중 앞에서 참혹하게 죽이는가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다 비밀리에 처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어디론 가 끌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보위원이 경비원과 함께 흰 장갑을 끼고 집총자세로 나타나 「누구 누구 나오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불려간 수감자들은 대부분 비밀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이렇게 불려가 돌아오지 않거나, 병에 걸려 격리수용된 후 돌아오지 않는 사례가 25~30건 정도 있었어요. 만약 비밀처형하 지 않고 다른 작업장으로 이동을 시킬 경우 에는 10~20명 단위로 이동을 시키는데, 그 때는 보위원들이 흰 장갑이나 집총자세로 나타나지 않으며 「소지품을 가지고 나오라 」고 명령합니다』
김용씨는 14호 수용소는 다른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공개처형은 금지되어 있으며, 대신 조용히 끌어다 비밀처형을 한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비밀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 고 말했다. 김용씨의 증언.
『공개처형은 공포심 조장을 위한 목적에서 시행됐는데 너무 자주 죽이다 보니 반발심 만 일으켰다고 합니다. 또 공개처형을 하려 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감자들을 한자리에 모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더 큰 불 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아요. 1990년에 14호 관리소에서 보위원이 수감자를 처형 하는 모습에 흥분하여 폭동이 일어나 보위원 8명이 살해됐다고 합니다. 폭동 진압을 위해 보위원과 경비원들이 기관총을 난사 하여 수감자 1500명을 사살했고 시체는 폐 갱에 처넣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답니다. 이 사건 이후 14호 수용소에서는 공개처형이 사라졌고, 수감자들의 내무반 출입문을 철 문으로 교체하여 일과를 마친 후에는 밖에서 철문을 굳게 잠그고 다음날 아침 기상 시간에야 열어 주곤 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13호, 22호 수용소 경비원이 었던 안명철씨의 증언과 일치한다.
수감자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소들의 배설 물에 박힌 강냉이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고 박는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안혁·강철환씨나 안명철씨의 증언에 의하 면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이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으며, 수용자의 80%가 펠라그 라병(단백질 부족증)에 걸려 있는 상태라고 한다. 김용씨도 이들과 똑같은 증언을 했 는데, 김씨는 14호 수용소에서는 펠라그라 병을 「개병」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15호 수용소에서 쥐를 잡아 먹은 내용을 질문하 자 김용씨는 『쥐를 잡아먹을 정도면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말했다.
『14호 수용소에는 쥐를 잡아 먹고 싶어도 씨가 말랐는지 거의 보이지가 않더군요. 산골 지역이라 가끔씩 뱀이나 벌레 등을 잡아 먹은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을 잡아 먹다 보위원에게 들키면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 다. 목욕을 거의 못해 몸에 이가 많은데, 수감자들은 이도 고기라면서 그냥 죽이지 않고 입에 넣어 씹어먹습니다』 김용씨는 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대부분 수감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자와 노약자, 병자들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끌려오면 처음 1년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요. 사회에서 먹던 습관 때문에 음식의 양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감된 지 1년을 못 넘기고 굶어 죽거나, 기력이 없어 작업 도중에 사고를 당해 죽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저도 처음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 처음 1년간은 너무 배가 고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또 고통이 극에 달해 자 살할 결심을 한 것이 수십 번도 넘어요. 한 번은 제가 굶주림 때문에 빈사상태에 빠지 자 굴진조장 김재근이 자기 배급량 전부를 저에게 주면서 「이것 먹고 힘내라」고 하 더군요. 김재근은 인정이 있고 리더십이 있 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자살하기 위해 광차를 일부러 탈선시켰는데 그만 달리는 가속도에 의해 광차보다 먼저 몸이 튕겨 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수감자 들은 지나가는 광차에 일부로 치여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단순사고 사로 처리한다. 수용소에서 자살은 금지되 어 있고, 자살 미수자는 반역자로 몰려 처형된다. 수용소는 죽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공간인 셈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오랜 기간 생존한 수감자 들은 나름대로 적은 양의 강냉이만 먹고도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을 많이 먹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굴진조장이었던 김재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더군요. 절대 물을 많 이 먹지 마라. 목이 마르면 소금 탄 물을 한 모금씩 여러 차례 나눠 마셔라. 배가 고프다고 해서 물을 많이 먹고 작업장에 나오면 금방 탈진해 죽는다. 또 절대 옆 사람 밥그릇을 넘보지 마라. 나에게 주어진 양만 가지고 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정 배가 고파서 견디기 힘 들면 소금을 한 알씩 먹어라. 이런 내용이 었습니다
1994년에는 坑內의 작업을 감독하러 들어갔 던 보위원과 경비원 두 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곳에는 6명의 채탄조가 작업하고 있었는데, 다른 보위원들이 6 명의 채탄조를 잡아다 『자백하라』면서 모두 때려죽였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채탄조가 보위원과 경비원을 살해한 후 사람 접근이 어려운 폐갱에 시체를 숨겼을 것으로 추 측했다. 지하수가 흐르는 폐갱에 시체를 던져 넣으면 그곳은 완전한 암흑 세계이기 때문에 절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들어왔다가 成人이 된 수감자들은 사회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도주할 엄두를 못 내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붙잡혀 온 사람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에서 종종 탈출을 기도한다고 한다. 또 아버지의 잘못으로 가족들이 함께 끌려오면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절망 분노하여 아버지 를 살해하는 경우도 가끔씩 발생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도의 통제장치와 가족에 대한 극 심한 탄압 때문에 自力으로의 탈출은 기대하기 힘들며, 경비원이나 보위원 등 내부 협조자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수용소에서 탈출 사고가 나면 1주일간은 수 용소 내부를 수색한다. 혹시 물에 빠져 죽 거나 산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은 아닌가 하며 내부 수색을 하는 것이다. 보름 동안 수색해도 행방이 묘연하면 사회안전부 교화국 산하에 비상이 걸리고, 20일이 경과해도 찾지 못하면 전국적인 수사가 벌어진다. 이 때는 각 도시군의 안전부를 통해 각 인민반 에 도주자의 인적사항과 사진 등이 통보된 다고 한다
. 다음은 김용씨가 증언한 노동당 선전비서 출신 수감자(이름 기억 못함)의 탈출기.
『평북 구성시당 선전비서를 지내던 사람이 가족과 함께 18호에 들어왔는데, 그의 외 사촌 동생이 18호 경비분대장이란 사실을 당국이 몰랐습니다. 선전비서는 분대장으로 있던 외사촌 동생을 설득하여 그의 아들을 탈출시켰어요. 아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적은 편지를 가지고 수용소를 탈출하여 평 양까지 잠입해 중앙당 정문에다 그 편지를 뿌린 후 할복하기 위해 배를 갈랐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체포돼 공개총살을 당했는데, 수감자들은 아들의 용기에 감복해 「안중근」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18호 수용소에서는 14호에서 구경하지 못했던 공개처형이 실시됐다는 점 이다. 18호 수용소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는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기 때문에 간 큰 사람들은 밤에 몰래 14호 수용소까지 헤엄 쳐 건너가 14호 관리소 창고의 물건을 훔쳤다. 한번은 다섯 명의 수감자가 14호에서 물건을 훔쳐가지고 돌아오다 체포돼 전원이 공개 총살당했다고 한다.
1998년 5월경의 일이다. 식량난이 점점 심 해진 때문인지 배급량이 갈수록 줄었다. 사회에서도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판이었으니 수용소 수감자들의 식량난은 더욱 극심했다.
김용씨의 어머니는 날마다 산에 올라가 산 나물과 칡뿌리를 캐다가 아들에게 풀죽이나 마 한 공기씩 쑤어주곤 했다. 그 무렵 한 끼 식사는 멀건 풀죽에 통강냉이 한두 알이 전부였다고 기억했다. 이런 음식을 먹고 탄광에 나가 중노동을 해야 했으니 기운이 날 리가 없었다.
허기진 김용씨 어머니는 나물을 뜯으러 산 에 올라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수용소 규칙에 의하면 오후 5시 이전에는 야산 에서 반드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다. 김씨 의 어머니는 해가 질 때까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야산지역을 순찰하던 경비원 에게 발견됐다. 김용씨는 새벽에 작업장으 로 나가 밤 11~12시경에 집에 들어오기 때 문에 어머니가 쓰러진 사실을 전혀 몰랐다 고 한다.
경비원은 어머니에게 『왜 밤에 산에 나다 니는가』 하며 도주자로 몰아 끌고 갔다. 밤늦게 김용씨가 소식을 듣고 담당 보위원 에게 달려가니 어머니는 뼈만 남은 손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얼굴은 얼마나 맞았는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 다. 당시 정황에 대한 김용씨의 자필 수기 를 소개한다.
<나는 담당 선생에게 엎드려 『선생님, 늙은이가 몰라서 그랬으니 한번 용서해 달라 』고 사정하자 그놈은 『야 이 새끼야. 규 정에 저녁 5시면 산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 모르는가?』 하며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관리소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특별 아지트(영창)에 데려다 놓고 70 고령이 넘은 늙은 어머니에게 대동강변에서 돌쌓기 하는 일을 강요했습니다. 잘 걷지 못하는 우 리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우고 젊은 놈들 둘이서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 사타구니에 몽둥이를 끼운 채 넘어지지 않으려고 나무를 꼭 쥐고 우들우들 떨며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 아들인 저의 가슴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김용씨 어머니는 대소변도 못 가리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김용씨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고아처럼 국가에 기탁되어 자랐으니 부모에 대한 정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잘 나가던 자신의 인생을 불행의 함정으로 빠뜨린 존재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따스한 피 가 흐르는 인간인지라 싫건 좋건 그를 낳아 준 분으로서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김용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얘야, 나는 더 살 것 같지 않으니 너 하 나라도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 겠는가』
그렇다면 14호 수용소에는 어떤 사람이 끌려오는가. 이 질문에 김용씨는 정부 제도에 반대한 자, 방해 책동자,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모욕하거나 비판하는 발언을 하다 발각된 자, 기독교를 믿다가 발각된자, 간첩 , 치안대 관련자, 공장에서 기계를 파괴한 자 등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적대범들이 주 로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악질분자로 분류되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반대 발언자, 군사정변이나 쿠데타 기도자 등이라고 한다.
14호에는 상점이 없었으나 18호 수용소내 에는 상점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금, 성냥, 국사발과 밥사발, 손톱깎이 등을 판매한다. 물건은 사탕, 술 등 여러 가지를 진열해 놓았지만 이것은 전시품일 뿐 구입 할 수 없는 물건이다. 게다가 한 달에 30원 의 노임이 지급되었다. 월급에 대한 김용씨 의 증언.
『18호에서는 한 달에 30원씩 노임을 현찰 로 지급한다고 규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노임을 타는 사람은 100명 중 세 명이 될까 말까 합니다. 작업장에 세 번 지각하 면 월급이 나오지 않고, 5분 이상 지각하면 식량 배급표를 주지 않아요』 안명철씨가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22호 수용 소에서도 수감자들에게 연간 500원 정도 돈 을 주었다고 한다. 安씨는 수용소 내에서는 돈이 있어도 쓸 곳이 없기 때문에 보위원 들이 암거래를 통해 수감자들에게 군복이나 신발을 몰래 팔고 돈을 갈취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일부 지역에서 월급도 주고, 생필품을 파는 상점도 존재하는 것은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일종의 집단농장이나 자치탄광이라고 위장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14호에 비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 졌으니 김용씨가 18호로 이감된 것은 그들 의 말을 빌리자면 「김정일의 광폭정치에 은혜를 입은 셈이다. 김용씨도 18호 수용 소의 현실을 체험한 순간, 『살았다. 여기 서는 잘만 하면 목숨을 잃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김용씨는 18호에 와서야 그의 어머니가 18 호 관리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태어나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한 집에서 어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용소 생활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囚 수용소는 죄 를 지은 당사자만 잡아다 수용소에 수감하는 것이 아니라 연좌제에 의해 부인과 아이 들은 물론 부모까지 3代를 잡아다 수용시킨 다. 이것은 『말 한번, 행동 하나 잘못했다 간 가족 3代가 몰살당한다』는 공포심을 유 발시켜 주민을 통제하기 위한 고도의 체제 유지용 폭압장치인 셈이다. 안명철씨는 정 치囚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는 이유는 『정치 범은 3代를 멸종시키라는 김일성의 교시 때 문』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김용씨가 수감될 당시는 자신의 부 인과 강제 이혼을 시켜 부인과 가족들은 수 용소에 끌려오지 않았으며, 호적을 위조한 김용씨는 14호에, 그의 어머니는 18호에 분리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례를 보면 최근 들어 철통같이 운영 되던 연좌제 시스템이 일부 느슨하게 운영 되는 등의 변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그 이 유에 대해 안명철씨는 『가혹하게 연좌제를 실시한 결과 정치囚의 수가 기하급수적으 로 늘어 수용능력이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씨는 14호 수용소가 남녀를 철저히 분리 수용하는 이유는 『 반동의 씨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 고 답했다
또 1997년 7월에는 황장엽씨 부인과 아들을 제외한 일가 친척 여러 집안이 18호 수용소로 끌려온 사실도 증언했다. 황장엽씨 일가 친척은 강원도당 책임비서, 중앙검찰소 책임비서였던 피창연의 가족을 포함한 105세대가 대거 수용될 때 같이 끌려왔다고 한다.
이들은 18호 수용소 내에서도 지형이 가장 험한 범골 지역에 수감된 후 그 일대에 감 시병을 겹겹이 배치했다. 김용씨는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전해 들은 사실임 을 전제로 『황장엽씨 조카(이름 기억 못함)가 18호 수용소에 끌려온 다음날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여성 수감자들 수용소를 운영하는 안전원들의 性的 노리개로 이용되는 현실=
14호 관리소의 경우 노력자(노동력이 있는 성인 수감자)가 1만5000명(어린이 및 노 약자 수는 정확히 기억 못함)이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1990년 14호 수용소에서 폭동이 일어나 15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된 사실도 김영일로부터 확인한 내용이다. 다 음은 김영일을 통해 들은 14호 수용소 여성 수감자들의 이야기.
『14호 관리소에서는 간부 초대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평양에서 부부장(고위 간부 ) 급이 내려오면 숙식하는 일종의 특각(별 장)입니다. 평양에서 간부들이 내려오면 여성 수감자 중 얼굴이 반반한 21∼25세 사이 의 처녀들을 선발하여 목욕을 시킨 후 간부들에게 바친다고 합니다. 간부들은 이런 여 성들을 온갖 性的 노리개로 삼은 후 비밀유 지를 위해 「도주분자로 몰아 비밀리에 죽인답니다』
14호 수용소는 남녀를 엄격하게 분리 수용 하기 때문에 임신 사건이 없지만 18호에서 는 수용소의 허락을 맡아 수감자들간에 결혼이 허용되며, 결혼한 사람들이 출산하여 아이를 안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 했다. 또 과부와 홀아비 간에 결혼이 허용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여성이 임신을 하면 수감자 중에 소파수술 을 전문으로 해주는 아주머니가 아이를 지워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결혼 방식이나 임신녀 출산 사실은 안명철씨가 증언한 22호 수용소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나마 관대한 편이다. 22호의 경우 폭동이나 소요 방지를 위해 보위원들 의 정보원 노릇을 잘 하거나, 생산량이 월등히 뛰어난 남녀를 선발해 일년에 한두 쌍 정도 선전용으로 결혼시킨다고 했다. 특히 22호 수용소의 경우 부부간의 출산, 수용 소 내에서의 결혼으로 인한 출산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임신과 출산은 엄격히 금지시키며, 임신 여성이 발견되면 남녀를 함께 비밀처형시킨다고 한다.
이처럼 심하게 남녀간의 성생활을 통제하다 보니 한 가족의 오누이간, 母子간에 성관 계를 맺는 등 가족 윤리가 파괴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가족간의 성관계에 대한 내용을 질문하자 김용씨도 『18호 수용소에도 오누이간에 성관계를 맺다가 임신이 되어 죽음을 당한 사례가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18호 수용소에서는 얼굴이 고운 여성 수감자들이 보위원이나 안전원들의 性的 노리개로 이용되다 죽음을 당한 사례가 있었다며 다음 과 같이 증언했다.
『18호 수용소에는 과거 김병하 보위부장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건물이 워낙 넓어 한쪽은 보위원에게 제공되는 술공장으로 이용 됐고, 나머지는 기생파티하는 곳으로 이용 됐습니다. 외부에서 간부들이 오면 얼굴이 고운 여성 수감자들을 깨끗이 목욕시켜 데려다 노는 장소였지요. 여성 수감자 중에 황금순이라는 처녀가 얼굴이 가장 고왔습니 다. 어린아이 때 부모와 함께 끌려왔는데, 수용소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잘생겼는지 사내들이 홀딱 반할 정도였어요. 황금순은 18호 관리소장 강창현의 전문 위안부로 자주 불려갔습니다. 그런데 김유 배라는 안전원이 황금순을 좋아하여 강간했 는데, 그녀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자 강가에서 때려 죽이고는 대동강에 시체를 빠뜨렸습니다. 그 현장을 같은 지역에 살던 김종훈이란 수감자가 몰래 보고 저에게 이야 기를 해주어서 알게 됐어요』 여성 수감자들이 수용소를 운영하는 보위원 이나 안전원들의 性的 노리개로 이용되는 현실은 안명철씨가 밝힌 22호 수용소의 장 면과 거의 비슷했다
김용씨에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에 대한 증언에 대해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고 말하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곳에 5년간 살다 온 사람입니다. 또 제가 한 얘기는 나의 체험을 가감없이 ,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은 내용만을 증언한 겁니다. 그곳에서 목숨 걸고 살다 온 사람 이 하는 얘기를 믿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믿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의심 많은 사람 들에겐 무슨 증거를 가져다 줘도 「그걸 어 떻게 믿느냐」고 말할 겁니다. 저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의 진실을 증거가 없어서 못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그 증거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쓸데없이 의심만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나에게 직접 와서 물어보세요』
설마 저들도 인간인데, 같은 인간을 상대로 그렇게까지야 하겠는가」 하고 말 장난을 하는 사이에 북한의 수용소에서는 수도 없는 인간들이 맞아 죽고, 굶어 죽고 , 총살당해 아까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저들이 더 이상 인권 유린을 당하지 않도 록 김정일에게 압력을 하는 것이 세계적인 인권 대통령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아시아감시위원회(Asia Watch)와 미네소타 변호사 국제인권위원회가 공동 발간한 「북한의 인권」 서문에는 「인권의 존중보다 는 침해를, 인권의 신장보다는 축소를 조장 하는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논리와 명분으 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권침해와 축소 말 살의 상징인 金正日 정권을 향해 金大中 정 부는 햇볕정책이란 이름하에 달러와 비료를 공급해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自任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 조직적 인권말살의 상징」 인 김정일과 「 세계적인 인권 지도자」이며 「민주화의 등 불」인 김대중 대통령이 어깨를 껴안은 채 정상회담을 논하고 통일을 논의할지도 모르는 시대를 맞게 됐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운영하는 정치범 관리소
1972년 前 국가정치 보위부장 김병하의 발기와 金日成의 교시에 의해 설립됐다. 1968년 황해남북도의 군사분계선 부근(주로 개성, 금천, 용연, 장연, 안악, 은율, 취 야, 장풍, 개풍, 판문 등)에 거주하던 월남 자 가족과 6·25 전쟁 당시 치안대 가담자 , 국군이나 미군에게 협조한 자, 지주, 친 일파 중 그때까지 살아남은 본인 및 가족들 을 북쪽의 주민들과 교환한다는 구실로 화 물기차에 실어 12개의 험준한 산악지역에 설정해 놓은 특수구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 시켰다. 이곳에 끌어다 놓고 외부와의 접촉 은 물론 서신거래 등 사회와 완전 차단시킨 것이다.
그 무렵은 수용소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은 아니었고, 수감자 관리와 시설 운영은 사 회안전성 안전과가 담당했다. 격리수용된 사람들 중 본인에 한해 죄가 엄중하다고 분 류된 자들은 개천교화소와 청진에 있는 수 성교화소를 정치범 교화소로 개조하여 이곳 에 별도로 수용한 것이 정치범 관리소의 첫 출발이다. 그런데 탈출자가 속출하고 대규 모 폭동이 발생하면서 경비 통제도 한층 강 화되기 시작, 오늘날의 관리소 형태가 된 것이다
金龍씨 약력
1950년 1월18일 황해도 신계군 적여면 대평리 출생
●1954~63년 황해남도 벽성애육원(고아원)
●1964년 평남 강서초등학원 입학
●1968~70년 청진시 신암구역 신진동 준첩 사업소(항만건설) 노동자
●1970~74년 정부요인 호위총국 독로강체육단 유술(유도)선수로 선수생활(계급:소위)
●1974년 체육단 해산
●1974~80년 김책공대 자동화공학부 인쇄과 재학
●1980~87년 조선인민군 489군부대(인민무력부 청사관리국) 원산출장소장(계급:중좌)
●1988~90년 사회안전부 동흥무역회사 서해아사히주식무역회사 대리인(부사장)
●1990~93년 국가안전보위부 신흥무역회사 서해아사히주식무역회사 대리인(김정일의 5·3 방침에 의해 사회안전부 동흥무역회사가 국가안전보위부로 넘어감)
●1993년 5월 과거의 경력위조가 탄로나 체포, 조사
●1993년 8월 말 14호 정치범 관리소(평남 북창군 득장구:실제 위치는 개천)에 수감
●1995년 10월 18호 관리소로 이관
●1998년 9월25일 18호 관리소 탈출
●1998년 12월29일 남양에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도문으로 탈출
●1999년 7월27일 중국-몽골 국경 월경 도중 몽골 수비대에 체포, 중국 국경경비대에 넘겨짐. 14일간 중국 국경경비대 감옥에 잡혀 있다가 8월10일 몽골로 탈출
●1999년 10월 서울로 귀순
월간조선 발췌
美 ABC방송] ‘연변의 탈북자들’ 3부작 방영
▲설명 : 중국 내 탈북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미국 ABC방송 ‘나이트라인 ’의 3부작 특집프로그램 ‘숨겨진 삶 ’의 일부. /ABC방송 인터넷 웹사이트
미국 ABC 방송의 간판격 시사 토론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Nightline)’이 최근 탈북자들의 비극적 실태를 3부작으로 방영한 ‘숨겨진 삶(Hidden Lives)’이 미국민들을 울렸다. ABC는 교포 다큐멘터리 감독 김정은씨가 중국내 탈북자들의 힘겨운 삶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그림자와 속삭임(Shadows and Whispers)’을 ‘?겨진 삶’이라는 새 제목 아래 3회로 편집해 방영했다.
지난 5일 첫회 방영에 이어 7일 2회, 그리고 마지막회가 전파를 타고 미국 전역에 방영된 12일, 나이트라인의 앵커 테드 카플(Koppel)은 “이 필름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잔인하고도 비참한 선택들을 목격했다”면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안다”고, 미국민들이 북한인과 탈북자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임을 촉구했다. 그는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은 ‘악의 축’의 일부분이 아니다”라며 “그들은 바로 그 희생양들”이라고 말했다.
카플은 첫회에서, 이스라엘에서의 팔레스타인인(人) 자살 테러나 인도·파키스탄 분쟁 등 주목을 끄는 뉴스는 많지만, “이 탈북자들의 얘기야말로 우리의 가슴과 양심을 건드리는 소재”라고 소개했다. 나이트라인의 선임 프로듀서인 사라 저스트(Just)는 이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로 결정한 배경에 대해, “이것은 상상키 어려운 절망적 삶”이라며 “탈북자들은 굶어 죽느냐, 두려움 속에서 도망치는 삶을 사느냐라는, 어떤 인간들도 하기 어려운 선택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3회에 걸쳐 1시간30분 동안 방영된 이 필름의 주요 내용이다.
◆ 토굴의 이산가족
1년전 탈북한 김만수씨 가족은 연변의 산골에서 토굴을 파고 산다. 부인은 갓난 아이를 중국가정에 떼어보낸 뒤 여러차례 쥐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두 딸도 고아원에 차례차례 보냈다. 도저히 먹이고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5살짜리 아들도 고아원에 보내야 할 것인지, 김씨 부부는 고통스런 고민을 하고 있다. 김씨는 토굴에서 걸어서 1시간 떨어진 담배농장에서 일하고 받는 소량의 쌀로 연명하고 있다. 임금은 따로 받지 못한다. 토끼와 새 등 산짐승을 잡는 게 부업이다. 4개월만에 고아원의 딸들을 방문한 김씨 부부는 아들마저 그 고아원에 맡긴다. 난생 처음 가족 사진을 찍고 난 뒤, 김씨 부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토굴로 향한다. 김씨는 “붙잡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만 하다”고 말한다.
◆ 인신매매와 당국의 검색
순자씨는 인간밀매꾼에 붙잡혀 중국 홀아비에 팔아넘겨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녀처럼 팔리는 탈북 여인들이 한두명이 아니다. 아이들도 인간밀매꾼에 붙잡히면 자식없는 가정에 팔린다. 아이 1명당 가격은 2000위안이다. 1년전 탈북한 현진과 수희 부부는 다섯살난 아이를 북에 남겨두고 왔다. 수희는 아이를 보고싶어 밤마다 통곡했다. 이 부부는 얼마전 돈과 식량을 빌려, 중국인 2명에게 아이를 데려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중국인들은 일을 성사시키지도 못하고 오히려 현진 부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현진은 “우리 삶은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한다. 수희는 “북한에서 몇몇 사람들은 인육(人肉)으로 만든 소시지와 피로 만든 푸딩(pudding)을 팔다가 붙잡혀 처형됐다”고 말한다. 탈북자를 돕는 교회나 단체들은 중국 당국에 적발되면 처벌을 받는다.
◆ 방기(放棄)되는 어린이들
어린이들은 탈북자들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가족에 대해 물으면 “굶어 죽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뭐하는지 모른다”고 답한다. 천연덕스러운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서글프다. 10대 어린이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수한다. 중국에서 구걸 등을 통해 번 돈으로 북한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다. 이런 어린이들은 국경을 넘을 때 꼬기꼬기 밀봉한 중국 지폐를 먹어 버린다. 붙잡힐 경우를 대비해서다. 나중에 대변과 함께 나온 그 ‘물건’이 그들의 ‘전리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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