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글엔 늘 꼼수가 숨쉬고 있는 바,

이 여자의 글을 읽고 단순 자연예찬이라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프락치론의 대가들이 그것도 못읽어 낸다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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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겨울의 산책로에 서면 풀들은 쪼그라들고 나무들은 헐벗어 있다. 앙상히 말라보이는 손들, 가지를 하늘 향해 초조히 하염없이 뻗지른 나무들이 눈에 보이는 데마다 끝없이 섰다.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건만, 없으련만, 하늘이 침묵하고 땅이 침묵하는 긴 침묵의 시간이 다하도록 그들은 대답을 갈구하며 기다림의 갈구를 떨치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초췌하게 초라하게 아둥바둥하는 몸짓으로 그렇게 서있었다.  

누렇게 마른 풀들은 다시 피나지 못할 것 같고 나무들은 영구히 손을 내저으며 애절한 몸부림을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나날들의 사이에서도 기나긴 사념에 지치고 가슴에 끝없어보이는 고통을 담고 사는 사람은 여전히 침묵하며 메마른 길을 걸을 것이다. 그리하여  눈이 내리던 날도 있었고 겨울비가 발길을 휘감기도 하였다.

겨울이 오면 희망은 다시 움트기 힘들 것 같고 나무들은 쓸쓸히 잎을 떨군다. 더 이상 기대할 것도 버티울 기운도 없다는 듯이.

그러나 동백은 다르다. 그녀의 초록 잎사귀는 더 단단해지고 짙은 초록빛으로 변하다가 변하다가 나중에는 검정에 가까운 검푸른 빛으로 잠겨들고 응결한다. 그 상태로 긴긴 겨울을 나는 것이다. 추레히 떨어뜨리는 잎새 한 장 없으며 몸짓은 야무지게 뭉치고 뭉쳤다. 그녀는 계절과 하늘이 침묵하는 시간을 알기에 그 시간을 갈구하지 않고 외치지 않으며 스스로 옷자락을 여미어 기다리기로 한다.

아무 울림도 아무 반향도 일체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가늠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냉결한  바람 속에서 문들은 닫히우고 그녀는 내부 만을 향해 열었다. 그 안에서 깊은 샘물을 퍼올리며 하늘이 열리는 날, 부르시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노크하지 않으며 그녀 또한 인기척을 기대하지 않는다. 겨울은 동토의 장이고 겨울을 겪어야 하는 인생은 사방에 널렸다. 그것을 몸부림 치고 애절히 외치어 지날 것인지 스스로 뭉치고 초연하며 기다릴 것인지는 자기에게 달리었다. 동백은 그렇게 하루를 나고 바람을 견디며 겨울을 난다.

추운 겨울의 길목에서 옷깃새로 스미는 바람에까지 움츠러들던 그 어느 날, 보라. 드디어 동백의 잎파리가 누렇게 변하는 것을,

그녀는 이제 쪄들었다. 늙은 노인의 처처이 갈라지고 타버린 살갗처럼. 메주보다 누우렇고 묵은 된장처럼 변개해버린 그녀의 살갗. 내면의 응고와 기다림이 처연하던 고통이 고독이 드디어 산화한 것이다. 산산이 산소와 합하여 무성하고 싱싱하던 지난 여름의 초록잎들은 싯누러이 산화된 전사처럼 황색 화합물로 바꾸어져 버렸다. 더 이상 응고할 것도 기다릴 것도 없는 듯이 이대로 서서 정녕히 죽으리라는 독한 결심을 잎새는 말하고 있다. 소리없는 외침이고 독립투사보다 처연한 몸자세다.  

그리하여 문득 그 위로 한 줄기 따뜻한 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새들이 울었다.  동백은 벌레가 수분하지 않고 새가 수분하는 꽃나무다. 구차함을 바라지 않는다.  죽음의 앞에서 쪄들 대로 쪄들은 두꺼운 잎들 사이로 추접한 자태의 꽃봉오리들이 알지 못하는 새 다닥다닥 여물었다. 견뎌온 절망을 휘두르지도 않으며 다가온 봄을 환호하지도 않으면서 배시시 웃는다. 

이 봄의 어느 날 그렇게 꽃이 피어났다. 신기하게도 새빨갛다. 누우런 잎사귀들 사이에서. 누우렇고 철면피하도록 두껍던 잎들 사이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빨간 색.  싱싱한 빨간 동백꽃이 노란 꽃술까지 표출하며 피어났다.  봄의 전령처럼, 또한 기나긴 기다림의 보람이 있다는 듯. 하얀 햇살 아래 우아하고도 단단하게 피어났다. 자랑스러운 그녀다.

2006.3.8. 파아란 한은경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