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슥한 저녁, 희미한 가로등이 그 입구를 무덤덤하게 핥을 뿐인 어둑한 골목길로 돌아들다가 그만 감전이라도 된 듯 나는 멈춰섰다. 멀리 부평에서 출장나온 형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에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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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려고 했는데 마치 내 다리는 늪 속에 빠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형사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왔다. 나는 그 다음 골목에서 붙잡혔다. 막다른 골목이었고 어느 집 대문을 속수무책으로 두들기다가 뒤로 팔이 꺾였다.
철두철미하게 움직이지 못했던 나의 불성실과 섬세하지 못했던 부주의로 그만 몇 개월 째 라인이 끊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마침 할아버지의 생신이기도 해서 잠시 들를까 했던 것인데 그만 팔이 뒤로 꺾인 것이다.
형사들은 마지막 선처를 베풀었다. 그들은 수갑을 채우지 않았고 나는 안방에 들어가 할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억지로 눈물을 참았는데 그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다녀올께요. 할아버지."
인사를 드렸는데 황소처럼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의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측은함과 가엾음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자책까지 뒤섞인 그 눈은 마치 할 수만 있다면 손자의 고초를 대신하시려는 듯했다. 강북의 끝자락에서 부평까지 승용차 뒷좌석 가운데에 머리를 처박힌 채 이송되면서도 내내 할아버지의 눈이 떠올랐다.
다행히(?) 고초의 시간은 짧았다. 주요 인물은 대부분 검거된 상태였으며 사실 부평서의 공안 형사들도 내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일종의 클리어링 작업이었다.
타박상을 동반한 며칠 간의 조사 끝에 내 이름이 적힌 서류가 인천지검으로 갔으나 그 무렵 터진 어느 초등학교 담장 붕괴사건으로 정신이 없던 담당 검사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나는 인천지검의 내리막 길을 터벅터벅 내려와 시장통으로 가서 비빔밥을 사먹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 그저께 검찰에 소환되었다. 연출인지 리얼리즘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단종된 낡은 승용차 조수석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카메라 앞에 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은닉한 자금으로 의심되는 백수십 억의 자금에 대하여 그는 현재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잠시 전두환 전 대통령를 생각한다. "김재규는 38구경 스미스 웨손으로…"라는 음산한 기자회견을 통해 등장한 보안사령관 전두환, 총칼로 권좌를 차지한 그 살벌한 이미지의 전두환 전 대통령.
그는 때때로 '비정치적'인 관점에서 살폈을 때 매우 '싸나이'다운 보스로 비쳐지기도 했다. 언젠가 읽은 신문의 가십인데, 같은 동네에 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행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면 그 비서진이 꼼꼼하게 계산을 하고 부속실로 영수증을 가져오라고 한 것에 비해,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은 시원시원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밥값이 64만원 정도 나오면 그냥 1백만 원짜리 수표로 결제하고 잔돈을 팁으로 뿌리는 호기를 부렸다는 것이다. 지난 김영삼 정부 때 연희동 골목에서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마치 '정치범'인 양 성명서를 읽던 모습을 떠올리면 과연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이번이야말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특유의 저돌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야 할 때가 아닌가. 무슨 삼국지의 영웅호걸 같은 이미지까지 얻은 장세동이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굳이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대신 처넣는 저 '카리스마'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물론 아직 혐의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차남 전재용씨의 말처럼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궁여지책의 변명처럼 들린다.
외할아버지가 백수십 억의 돈을 외손자에게 물려주는 예도 드물거니와, 검찰 안팎의 정보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 전 대통령 측에서 간신히 머리를 쥐어짜낸 고육책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세상에 상식과 법도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 있어도 최소한 가족의 윤리만큼은 있을 게 아닌가. 왜 자신의 죄를 아들에게 떠넘기는가. 왜 자신이 받아야할 고초를 둘째 아들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아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가.
그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이라도 봤을 게 아닌가. 그 드라마의 부모들이 과연 어떠했는가. 철창을 붙들고 울며 통곡하는 부모들. "아들 대신 나를 잡아가라"고 울부짖던 그 많은 부모들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재산이 29만원이면 어떻고, 숨겨둔 재산이 수천 억이면 무슨 소용인가. 그 돈으로 재기할 욕심인가. 그 돈으로 둘째 아들 대신 반드시 지켜야할 무슨 대단한 가치라도 있단 말인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지만 단 한번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자신의 은닉 재산을 소상히 밝히고 그 죄값을 치르면서 제발 둘째 아들만큼은 죄가 없으니 풀어달라고 호소하길 바란다.
도대체 이 세상에 자기 대신 아들을 감옥에 보내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작금의 이 사태야말로 인륜의 붕괴를 목도하는 참담함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일부러 이 짧은 칼럼에서 그 음산한 독재자를 '전 대통령'이라고 썼는데, 정말 그가 자신의 은닉 재산 뿐만 아니라 그 죄값까지 아들에게 물려주게 된다면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 공식명칭을 앞으로 평생 어떤 경우라도 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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