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화에 대해 많이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기록의 대국은 일본이고 우리는 그와 반대다.”라는 건데요.
2% 맞고 98% 틀린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인 사실 알고 계신지요.
그 이전의 고려시대에 씌여진 삼국사기를 치면 무려 1,000년 가까운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編年體史書)로 시정기(時政記)와 사관(史官)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 등록(謄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실록편찬의 기본자료였고, 문집·일기·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실록편찬 과정은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의 3단계로 나누어졌다.
초초는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자료를 뽑아 작성한 초안이다.
중초는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고, 정초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첨삭을 하여 완성한 것이다. (네이버 검색)]
크기만 해도 무려 2,077책으로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하고 있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 위치를 가질 수 있었던 시스템의 확보입니다.
기본 자료를 제공하는 사관과 그것을 모으고 총 정리해서 실록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관의 역할이 따로 나뉘어져 있어서 편향된 시각을 갖지 않게끔 하는 장치와
실록 한 권이 완성되면 그 소스를 제공했던 사초들은 물에다 씻어 누가 쓴 사초인지를 알아볼 수 없게 하여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들 사관들이 얼마만큼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었는가 하면
광해군을 광인(狂人) 즉, 미치광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며
실록은 대신들은 물론 왕 조차도 열람할 수 없었다고 하니 가히 놀랄만한 기록문화요 시스템인 것입니다.
실록의 위대함은 기록 그 자체에만 있지 않습니다.
왕과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회의 내용, 사건 사고 등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역사기록으로 남으니 왕과 대신들은 후대에 고스란히 전해질 자신들의 공과 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정치행위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태도를 견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제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아닙니다.
역사의식 박약을 자랑하는 이승만으로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빈약한 정당성과 군부독재의 그 몰상식, 그리고 정치행위에 대한 책임의식 결여 등의 이유로 기록은 맥을 잇지 못했습니다.
제주 4.3 항쟁, 광주 5.18항쟁, 군부쿠데타, KAL 858실종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지 말아야 할' 여러사건들의 기록이 훼손 또는 소멸되버린 상태이고,
따라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50년간 우린 '책임 실종의 정치시대'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우리는 간신히 그 기록문화의 맥을 다시 잇고 잇습니다.
정치인들이 아닌 일반 국민들, 21세기의 사관(史官)이 되어 대한민국실록을 만들어가고 있는 네티즌들입니다.
이들은 정치인들이 드러낸 말과 행동을 그대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사서에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누구나 어디서나 손쉽게 사실을 끄집어내어 그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하는 말 다른 봉숭아학당 수준의 정치인들에겐
행보의 무원칙과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전후사정만 들이대도 상당한 압박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습니다.
언론에 드러나는 말과 행동 이외엔 기록할만한 사초가 부족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우리당의 한 의원이 폭탄선언을 해 버렸습니다.
네. 바로 유시민 의원입니다.
엊그제 당의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대회에서도 그랬죠.
“국정, 당무를 여러분들이 마치 당의장이 된 것처럼 환하게 알 수 있게 매주 정무보고를 대의원님들께 하겠습니다.”
위의 말은 한마디로 책임정치 하게끔 시스템을 만들겠단 말입니다.
중앙위회의에 누가 참석했고 누가 불참했으며 누가 어떤 제안을 했고 누가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 했으며 어떻게 토론이 이어졌고 그에 따른 결과가 이렇다고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50년 만에 그 맥을 잇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선진정치를 모델로 제시하면 여타의 당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쫓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나라당은 이제야 뒤늦게 기간당원제로 내부진통을 앓고 있는데 게다가 유시민의원처럼 기록을 까발리겠다고 하면 그야말로 한나라당은 가랑이 찢어지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선조들의 깊이.
그리고 우리의 후대는 우리를 알아가면서 또다시 우리처럼 감탄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모범사례가 되는 이유, '기록문화'에도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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