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후 반세기에 걸친 金大中(DJ) 前 대통령의 정치행적을 가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공과 과를 가려 올바른 평가를 내리려면 아마 책으로도 족히 몇 권은 될 것이다. 이 글은 그의 타계(他界)에 즈음하여 그가 한국사회에 남기고 간 이런저런 행적 가운데, 특히 지역모순(’地域矛盾‘)의 심화를 통한 한국사회의 모순구조(矛盾構造)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필자의 평소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본다.--<이대근(李大根)>
한 社會의 성격과 矛盾構造
인류역사의 전개를 階級鬪爭의 歷史로 보는 正統 마르크시즘에서는 한 사회의 성격을 오로지 ‘階級矛盾’ 한 가지에 의해 규정한다. 古代 奴隸制 사회에서는 奴隸소유주와 奴隸간의 모순관계, 中世 封建制 사회에서는 地主와 小作人간의 모순관계, 그리고 近代 資本制 사회에서는 資本家와 勞動者간의 모순관계 등에 의한 규정이 그것이다. 1917년의 러시아革命은 바로 이런 러시아사회의 階級矛盾을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無계급사회를 실현한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시즘의 경우, 한 사회의 基本矛盾은 階級矛盾 한 가지만으로 설정한다는데 그것의 특징이 있다.
1930년데 이후 中國 사회주의 革命을 이끈 毛擇東에 의하면, 앞의 러시아 경우와는 달리 中國은 두 개의 기본모순을 설정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는 국내 地主階級을 대변하는 蔣介石과의 투쟁에서 제기되는 階級矛盾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침입해 온 日本 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제기되는 民族矛盾이 그것이다. 따라서 中國革命은 내부적인 계급모순의 해결과 동시에 日本 제국주의와의 민족모순 해결이란 두 개의 과정으로 전개되고, 이런 관점에서 그는 中國은 資本主義 사회가 아니라 ‘(半)植民地 半封建社會’라는 것이었다.
1949년 中共 정권 성립 이후, 中-소 두 나라 간에 제기된 이념적 對立/葛藤은 바로 이런 사회적 矛盾관계를 보는 양국 간의 입장 차이 때문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은 1958년경에 절정에 이르렀다. 中-소 이념투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럼 당시 北韓은 어떤 입장을 취하였나? 北韓은 이 무렵 ‘主體思想’이란 독자적 理論을 만들어 그를 토대로 中-소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中立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民族矛盾을 강조하는 中國 쪽으로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1987년 ‘6月 抗爭’과 대통령 選擧
北韓의 이런 民族矛盾 강조 추세는 1980년대 南韓 ‘民主化 運動’(필자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한다))에 그대로 흘러들었다. 기실 韓國의 경우도 中國처럼 지난날 帝國主義 침략을 받은 경험에 비추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란 두 개의 기본모순을 띠는 그런 사회였다고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민족모순을 앞세우는 北韓의 영향은 당시 南韓 내의 운동권을 이념적으로 兩分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계급모순을 앞세우는 기존의 ‘계급혁명파(PD계열)’과 새로이 민족모순을 강조하는 ‘민족해방파(NL계열)’로의 분열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主體思想을 신봉하는 ‘主思派’의 得勢와 함께 후자의 NL계열이 점차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南韓 내의 민주화운동은 絶頂에 달하였다. 운동의 담당세력은 이념적으로는 각양각색이었으나, 軍事獨裁를 종식시키고 ‘大統領 直選制’를 관철하자는 슬로건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1987년 ‘6월 抗爭’으로 정부/여당으로부터 대통령 直選制를 골자로 하는 盧泰愚의 ‘6-29선언’을 가져오고, 나아가 憲法 改正(6共 헌법)과 그에 따른 제13대 대통령 直選을 이끌어냈다.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임하여, 여당(民正黨)은 일찌감치 盧泰愚 후보를 내세웠으나, 진작 民主化 세력이라 할 야당(民主黨)에서는 이에 맞설 후보를 선출하지 못하였다. 金泳三(YS)계와 金大中(DJ)계로 갈라진 野黨은 어느 한 쪽도 候補를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黨內 후보 競選에 자신이 없었던 DJ계열이 일제히 탈당, 부랴부랴 新黨(平民黨)을 만들었다. DJ는 스스로 民主主義 대원칙인 競選制度를 파기하고 野黨 분열을 가져왔다고 하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런 猛非難을 감수하면서까지 獨自 出馬의 길을 걸은 DJ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4파전 必勝論과 批判的 支持論
선거에 임하는 DJ의 기본전략은 이른바 ‘4巴戰 必勝論’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대통령 후보 盧泰愚(민정당)-金泳三(민주당)-金鍾泌(공화당)에다 자신이 참여하는 4巴戰 선거로만 된다면 자신의 當選은 따놓은 堂上이나 다름없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4巴戰 필승을 위해서는 선거를 철저히 지역분할구도로 끌고 가야 한다는 것, 즉 노태우는 慶北, YS는 慶南, JP는 忠淸, 그리고 자신은 湖南을 지역기반으로 한다면, 數的으로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4巴戰 필승론이었다. 그리하여 선거 내내 충청도 기반의 JP가 도중 下車하는 일이 벌어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는 忠淸票가 다른 후보(노태우나 YS)에게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보면, 大選 出馬를 위한 DJ 平民黨은 처음부터 ‘湖南地域黨’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지역당으로서의 이 平民黨의 창출이 DJ로서는 1980년대 民主化 시대에 들어서의 최초의 선택이었다. 1987년의 13대 大選이 DJ의 의도대로 얼마나 지역분할구도로 치러졌느냐 하면, 慶南 지역 배경의 YS후보는 湖南에서는 법에 보장된 選擧遊說는커녕 발도 제대로 들어놓지 못하고 쫓겨날 정도였다. 慶北 지역의 盧泰愚후보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였었다. 여기에 대해 利害당사자인 DJ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으나, 아무튼 1987년의 大選이 얼마나 지역분할구도로 치러졌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는 선거의 地域別, 候補者別 得票결과가 또한 여실히 말해준다.*
* 1987년 大選 투표결과를 보면, DJ는 그의 지지기반인 湖南에서 有效투표의 88.4%를 얻어, 경쟁자인 노태우 후보의 慶北지역 得票率 68.1%, YS의 慶南지역 득표율 54.5%나 JP의 忠淸지역 득표율 34.6%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제3지역인 서울/경기/강원/제주 지역 득표율에서 DJ는 노태우 36.9%, YS 28.5%에 못 미치는 26.5% 得票로 결 국 선거에서 3등을 했다. 그의 ‘4巴戰 必勝論’은 완전히 無色해졌다.
1987년 DJ 平民黨의 출현을 놓고 우리가 그것을 지역정당론으로만 간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당시 DJ의 선거전략에는 앞의 ‘4巴戰 必勝論’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본 전략이 있었는데, 그것이 소위 ‘批判的 支持論’(批支論)이었다. 당시 獨自 후보를 낼 입장이 못 된 在野 내지 反體制 진영에서는 大選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래도 上位 4명의 후보 중에는 자기네와 이념적으로 가까운 DJ(평민당)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이것이 당시 운동권의 DJ에 대한 ‘批判的 支持論’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4巴戰 필승론과 批判的 지지론! 이것은 1987년 제13대 大選에서의 DJ(평민당) 必勝을 위한 양 날개와 같은 것이었다. 湖南 중심의 ‘地域政黨論’을 배경으로 前者의 4巴戰 必勝論이 DJ승리를 위한 必要條件이었다면, ‘理念政黨論’을 배경으로 하는 後者의 批判的 支持論은 그를 위한 充分條件과 같은 것이었다. 선거에 임하는 DJ(평민당)으로선 이 두 가지 조건의 充足을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
지역모순과 계급/민족모순의 결합
DJ 平民黨은 이처럼 特定 지역(湖南)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거기다가 特定 理念의 지지까지를 받는 그야말로 二重的 성격의 특수한 政黨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말하는 ‘특수한 성격’이란 사회모순론의 관점에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階級矛盾과 民族矛盾이란 두 가지 基本모순에다 ‘地域矛盾’을 선거용으로 政治의 前面에 부각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基本모순으로 格上시켰다는 점, 그리하여 한국사회로 하여금 계급-민족-지역의 세 가지 기본모순을 떠안게 만들었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특수성이다.
둘째로 들어야 할 것은 기존의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新規의 지역모순에다 정치적으로 결합시켜놓았다고 하는 점이다. 어떤 政黨이 특정 地域을 배타적 지지기반으로 하는 地域政黨 성격과 함께, 특정 정치이념 ― 그것도 과격한 反體制的인 성격 ― 의 배타적 支持를 받는 理念政黨의 성격을 동시에 띠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특수성이 그것이다. 이로써 DJ 평민당의 출현은 한국 政黨政治의 성격을 뒤바꿔놓았음은 물론, 한국사회의 矛盾構造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1987년의 ‘6월 抗爭/6-29宣言’과 철저한 지역정당구조로 치러진 제13대 大選과정이 그 후의 한국사회의 構造와 性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고, 이를 중시하여 “1987년 體制”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상과 같이, 1987년 DJ 평민당의 출현은 韓國政治史에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DJ가 이끄는 政黨은 그 이름이 어떻게 바뀌든 선거 때마다 湖南票의 90-95%를 휩쓸고, 이념적으로는 反體制/左傾세력의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진지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90% 이상의 湖南票의 이념적 성격이다. DJ가 이끄는 정당은 언제나 民勞黨 등 다른 이념정당과 밀접한 정책제휴를 해왔다고 하면民勞黨 지지표와 湖南票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DJ는 과연 무엇을 남겼나?
DJ정치의 일차적 遺産이라면 아무래도 지역모순과 계급모순을 한데 묶어 한국사회의 矛盾/葛藤구조를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크게 두 파로 분열시켜놓았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그것도 保守-進步(혁신)로의 단순한 분열이 아니라, 親北/反美 대 反北/親美, 體制와 反體制 등으로의 ‘심각하게’ 분열시켜놓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심각성은 이제 정부의 公權力으로는 그들 親北/反美, 反體制세력의 不法的 시위나 난동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른 정도라고 봐야 한다. 韓美 FTA 반대투쟁, 광우병파동/촛불난동사건, 그리고 龍山철거민사태나 雙龍自動車점거사태 등이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다. 그리고 그 심각성의 배경은 바로 DJ정치가 계급/민족모순과 지역모순을 한데 묶어놓음으로써, 그러한 사회적 矛盾/갈등구조에 대처하는 정부의 政策手段(公權力)을 무척 어렵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體制 守護를 위한 公權力 無力化에 직면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무엇일까? 정치적 포퓰리즘에 기대는 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1987년 體制’ 성립 이후 한국정치는 어느 政權 할 것 없이 각종 포퓰리즘에 시달려왔다. 中南美 型의 勞組포퓰리즘을 비롯하여 특정 地域포퓰리즘, 女性포퓰리즘, 野黨포퓰리즘, 심지어 對北事業(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 포퓰리즘에 이르기까지 한국정치는 포퓰리즘 천국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한국정치의 이런 포퓰리즘 현상이 DJ정치가 뿌려놓은 遺産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최근의 盧武鉉/金大中 前 대통령에 대한 현 정부의 가당치 않는 國民葬/國葬 결정을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
셋째로는 南北관계 인식의 틀을 바꾸어놓고, 그에 따른 국론 분열을 심화시켜놓았다고 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종전에는 南北관계를 보는 시각이 階級矛盾에 의한 순수 이념적인 대립에 주어졌으나, 1987년 체제 이후에는 거기에 지역모순이 결합됨으로써 단순한 左/右翼 대립을 뛰어넘는 親北/反美 대 親美/反北 또는 體制/反體制 간의 대립으로 확대, 심화시켜놓았다고 하는 점이다. 韓美 FTA 체결, 北核 문제, ‘6-15선언’의 受容 문제 등을 놓고 벌리는 양측의 대결양상에서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南韓 정치에 알게 모르게 北韓의 영향력을 끌어들여놓은 것, 이 역시 지역/이념을 한데 묶은 DJ정치가 가져온 歸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반세기에 걸친 지역주의 DJ정치가 이 땅에 심어놓은 씨앗은 엄청나게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걸 여기서 모조리 꿸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포스트 DJ(DJ 이후) 한국정치의 向方은 어디이며, 또한 당면 課題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DJ 이후 한국정치의 방향과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주도적으로 심어놓은 ‘1987년 體制’를 조속히 허무는 일이다. 그 아래 한국의 정치문화와 사회질서를 정상화하고 또 한 단계 격상(格上)시켜야 한다. 또한 현실의 지역 중심의 정당구조도 조속히 허물어야 하고, 그를 통해 지역모순을 계급/민족모순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끝으로 DJ식의 낡은 거리(廣場)의 정치, 示威(데모)의 정치로부터 벗어나 의사당(議事堂.屋內)의 정치, 토론(政策對決)의 정치로 레벨 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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