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년 독일, 2010 년 한국


정우상 조선일보 정치부 외교팀장


지난달 26일 서울 양재동 외교센터. 부탄 왕국의 민속 의상을 입은 유학생과 산업 연수생 15 명이 무대에서 민속춤을 췄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부탄 초대 총리인 지그메 틴레이(58) 총리를 위한 것이었다. 민속 의상을 입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틴레이 총리가 연설을 시작했다.


히말라야 '은둔의 나라'에서 한국까지 와서 남모를 서러움에 울었을 부탄 젊은이들의 눈과 귀는 틴레이 총리에게 쏠렸다.

"고국 걱정은 하지 마라. 국왕(30)이 백성을 잘 보살피고 있다. 형제들과 가족들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여러분은 한국에서 지식과 기술만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

한국이 어떻게 가난한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가 됐는지, 한국인들의 정신을 반드시 배워서 돌아오길 바란다."

1999년까지 텔레비전조차 없었던 나라 부탄. 현재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800달러의 빈국(貧國)이지만, 행복도 조사에선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국가다.

2006년 영국 레스터 대학이 178개국을 상대로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부탄은 8위, 한국은 102위였다.

해가 지면 가족끼리 둘러앉아 하루 일을 도란도란 얘기하던 왕정 국가 부탄은 2008년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국민은 "이대로 사는 것도 좋은데 왜 민주주의를 도입하느냐"고 했지만, 국왕이 앞장서 총선을 실시하고 의회를 세웠다.

그렇게 처음 선출된 총리가 틴레이 총리다.

"한국의 정신을 배워오라"는 틴레이 총리의 연설을 듣던 외교부의 한 당국자는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 파독(派獨)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 연설하던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해도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만들자"는 연설을 다 마치지 못했다. 대통령이 울자, 지하 수백 수천m에서 돈을 벌던 우리 광부들, 시신을 닦으면서 돈을 벌던 우리 간호사들도 울었다.

당시 필리핀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170 달러였고 한국은 76달러였다. 차관을 빌리러 독일에 간 대통령이나 돈을 벌러 간 광부·간호사나 같은 처지였다.

64년 독일에서 대통령과 '외국인(한국) 노동자'들이 한데 엉켜 "독일이 왜 잘살게 됐는지 꼭 배워서 돌아가자"고 다짐했던 나라가 한국이다.

그 후 반세기 만에 서울에서 만난 부탄 총리와 노동자들은 두 손을 잡고 "한국인의 정신을 배워 돌아가자"고 다짐하게 됐다.

틴레이 총리는 미국 유학파다.

나라가 부강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신적 자족(自足)만으론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한국을 배워오라고 하는데, 정작 빈국에서 세계 13위권 경제규모로 성장한 한국인들은
"잘살게 됐지만 행복하진 않다"며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있다.

저개발국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국가를 만든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이제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자학(自虐)의 눈만은 거둘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