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철학과 전망을 상실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심각한 가치관의 혼란과 중심 상실의 표류라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이다.
이런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전망을 바로 잡아야 한다. 전망을 바로 잡는다함은 사회의 중심, 국가전략을 올바로 세우고, 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여 사회 구심점을 회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한다.
광화문 현판 교체의 사례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 사안이다. 이것은 가시적, 생산적 사안이 아닌 상징적 사안이며, 상징적이기에 그 영향은 더욱 큰 것이다. 광화문의 유례와 현재의 현판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소개되었기에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광화문이 복원된 것은 경복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자기 집 청와대 대문으로 만든 광화문에 자기 문패 내걸고 그 문패도 썼다 지우고 또 썼던 오욕의 문패라는 사실을 다시 짚고 넘어간다.
최근 경복궁에 다녀 온 사람이라면 경복궁 복원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 것이다. 이전의 궁궐의 모습을 복원했다. 그리고 광화문 뒤에 숨겨져 있었던 일제 총독부 건물(구 중앙청)은 일찌감치 해체하여 그 첨탑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일제의 강점, 주권 침탈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문제는 광화문 현판을 갑자기 교체하겠다고 나선 것처럼 몰아가는 언론이다. 조중동이 나서서 정치공세라고 입방아를 찢고 있는 이 현판 교체 사안이 실은 이미 2년 전에 결정되어 있었던 문화재청의 사업을 이제 실현시키는 것이고, 정조의 글을 집자하기로 하였던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정작 문화재청장 유홍준씨가 드러낸 속내는 개혁성을 보였던 정조 대왕의 상징성을 부여하였던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에 대한 매우 심각한 비판행위이다.
역사를, 정치를, 상식을 건전하게 형성하지 못한 조중동의 시야에서는 그 좁은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다보니 정작 무엇이 국가 상징에 있어 가치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어서, 음모론으로 돌아서 버리는데, 이것은 현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철학과 전망의 상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정조 대왕은 임란 이후 쇠퇴한 조선사회를 재건시켰던 성군이셨다. 하지만 그런 정조 대왕의 개혁은 실패한 개혁이었다. 유홍준 청장의 대통령 비판과 전망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유홍준 청장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학자이다.
한국사회에는 두 부류의 학자가 있다. 하나는 정권에 아부하고,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파 계열의 학자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이래의 선비정신을 목숨으로 여기는 소수의 진실된 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품고 있는 학자적 양심이란 조선의 선비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왕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도끼 하나 들고, 궁궐 마당에 찾아가서 왕이여 내 말을 듣고 잘못을 고치던가, 그게 싫으면 내 들고 온 도끼로 여기서 나를 잡아 죽이시오, 하는 그런 양심을 가진 학자들이다.
유홍준 청장은 대통령이 개혁을 내걸었지만, 정작 개혁이 실종되어 가는 모습에 대해 청와대 대문 광화문에다가 실패로 끝난 정조 대왕의 친필을 걸어서 대통령이 집에 들어갈 때마다 그거 보고 가슴이 뜨끔해서 밤잠을 못 자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심각한 경계의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것이 유홍준 청장의 속내인 것이다. 이것을 정권에 아부하는 공직자라고 해석한 언론들은 자기들의 그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자신들이 접해본 적도 없는 학자적 양심을 해석해서 유포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정치적 공세라고 이해하는 시민들도 똑같은 방향 상실의 책임이 있다.
더욱이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한글주의자들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글주의자들 주장의 요지는 한문이 봉건 잔재이니 기왕이면 한글로 하자고 하는 것인데, 설득력이 전혀 없다.
왕조사관을 벗어나 민중사관으로 가자고까지 하지만, 현판의 한글/한문 선택이 사관 들먹일 문제는 아닌 것이다. 사관 들먹이려면 아예 현판을 당장 갈자고 나와야 올바른 사관이고, 한글로 하자면 한글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것인지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이지, 한문 쓴다고 왕조사관에 물들어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엇이 왕조사관이란 말인가? 실제로 왕조사관이란 말은 없는 말이다. 봉건적 역사관이라는 말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누가 왕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 또는 왕실 편찬의 정사에 집착하는 사관을 갖는다는 말인가?
왕조사관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을 마치 민중사관에 대비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자국의 역사를 비하하는 일제 식민사관의 연장 자체인 것이다. 왕조 시대에 작성된 왕실 정사는 왕이라는 통치자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왕실 정사를 마치 왕 중심의 역사관인 것처럼 이해하는 이 자들이 어디서 등장한 무리들인지 알 수 없다. 이들의 사유 형태는 식민사관의 후예들, 자국 역사를 폄훼하는 잔재들의 사고일 뿐이다.
선비가 도끼 하나 들고 왕에게 내 말을 듣던가, 나를 잡던가 양단 간에 결정하라고 할 정도로 조선은 언로가 열려 있는 사회였다. 그런데 왕조사관이라는 식민사관 계열의 거짓 역사 이론이 광화문 현판 교체에 이용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무식하고, 철학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식민학문 계열의 교육을 받은 자들과 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서구이론의 혼합물로 보인다.
우리의 역사 어느 부분도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역사는 연속성이지 편집성이 아니다. 편집성을 주장했던 것도 일제 식민사관을 만든 학자들이다. 정작 연속성을 찾고 군화발에 짓이겨졌던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지금의 현판 교체 사업인데, 왜 식민사관이 다시 등장하고, 역사를 단절시켜 편집하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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