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안에 강도가 들었다>
어떤 가난한 집안에 강도가 들었다.
허름한 단층 기와집이었는데 창문을 손쉽게 뚫고
한밤중에 대여섯명의 강도가 들이닥친것이다.
그들은 가족을 모두 묶어 감금했고 얼마 안되는 전 재산을 약탈해갔다.
그러나 그들은 돈과 물건만 훔친 것이 아니었다.
성에 굶주린 그 짐승들은 감금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내를 매일같이 수도 없이 욕보였다.
울부짖는 그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보란듯이...
얼마 안되는 전 재산을 강도에게 뺏기고 불행한 일까지 당한 그들에게
그 충격은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던가...아니면 전화위복이던가...
그 자녀들은 악착같이 살았다.
그들은 부모의 불행을 다시 겪지 않을 길은
우리가 잘 사는 수 밖에 없다고 여겼다.
굶주리던 그들에게는 일할 곳도 팔 물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카락도 잘라서 팔고,남의 집 머슴살이도 했다.
그저 잘살아보겠다는 신념만 가지고 악착같이 벌었다.
우리 자식들만은 좋은 세상에서 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의 불행한 과거를 물려주지 말아야지 하는 일념으로...
결국 그들은 일으켜세웠다.
굶주리던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
반듯한 집도 짓고 재산도 키워 다시금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모두 교육시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일으키게된다.
집안이 성공하자 서로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던
일부 몰지각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서로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게되었다.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던 그들의 굳은 다짐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부모가 겪은 지난 불행한 일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머릿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손자가 있었다.
가족들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할머니가 당한 그 성적모욕에 대해 전해듣고는
그 손자는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록 상고출신이지만 부모님의 꾸준한 배려 끝에 사법고시에 붙어
인권변호사로 성공하여 사회 상류층 입성에 성공한 그 아들에게는
과거 자신의 조부모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머슴살이를 했던 부모의 과거가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의 할머니가 너무나 더럽고 추하게만 보였다.
그는 강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자신의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견딜 수 없었고
자신을 머슴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린 아버지를 원망했다.
결국은 죽은 할머니와 아버지에대해 자꾸 험담을 늘어놓고
벽에 나란히 걸려있는 조상들의 사진들과 앨범속의 사진들 중에서
할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없앨것을 가족들에게 요구하게된다.
" 그 더러운 인간들과 살을 섞은 할머니의 추한 모습 이제 그만 지우고싶다.
욕보이기 전에 차라리 자진을 하던지,
아니면 목숨걸고 싸우든지 했어야 하는거아니냐?
그리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의집 종살이를 한 아버지의 모습도...
부잣집에 빌붙어 뭘 얻어먹겠다고 그러셨는지....
사람이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살아야 하는거 아니냐?."
그러나 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왜 할머니만의 잘못이예요?"
"그런 일이 생기게 한 우리 모두의 잘못 아닌가요?"
"잘못을 물으려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한테 물어야죠."
"그런 상황을 만든 무능한 할아버지의 잘못 아닌가요?
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능력을 키워 제대로 된 집만 가지고 있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거예요.아버지가 종살이 하는 일도 없었을테고요."
오빠는 흥분했다.
"그럼 부끄러운 과거사를 덮어두잔 말이냐? 너도 그 강도들과 한통속 이냐?
정리할건 정리하고 짚고 넘어가야 그걸 토대로 집안도 다시 화목해질 수 있는데
넌 그걸 덮어두잔 얘길 하는거야? 지금?"
여동생은 좀체 오빠의 말에 굽혀들지 않았다.
"좋아요. 우리 할머니 잘못했어요. 좀더 극렬하게 저항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당한거 나빠요. 그럼 오빠의 사고 기준은 옳은가요?
나쁜짓 한건 강도고,원인제공한건 할아버지예요.근데 왜 할머니만 갖고 그러시죠?
바로 옆동네에 그 강도의 후손들이 살아요
엊그제 오빠는 그들에게 가서 뭐라 하셨죠? 지난 일은 잊자고 하셨죠?
만약 그들이 건장하고 험상궂은 청년들이 아니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면
오빠가 그런 비굴한 태도 보였겠어요?."
오빠는 어이가 없었다. 가장의 권위를 무시당하는거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지금 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니?"
여동생은 굽히지 않았다.
"오빠의 심정 전혀 이해 못하는건 아녜요. 그치만 이건 아닌거 같네요. 전 오빠가 우리 할아버지를
나무란다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실수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흙이 되어버린 할머니의 얼굴을 앨범에서 도려낸다고 매일같이 집안에만 처박혀서
그 일만 하고 있어요.
온 식구가 오빠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두요. 오빠가 그러신다고 우리의 조상이 바뀌나요?"
미누나 고우나 우리를 있게한 할머니,아버지 아니신가요?"
여동생의 항의는 계속 이어졌다.
"도대체 왜이러시는거예요? 무얼 원하시는거예요?
오빠는 가장이시잖아요? 지금 집안에 산적한 일이 산더미인데
오빠가 앨범 사진에만 계속 매달려계시면
돈은 누가 벌어오고 애들 공부는 누가 시키나요?
왜 사진과 앨범속의 할머니만 지울려고 안달이시죠?
그 앨범은 좋건 싫건 우리 집안의 과거이고 역사인데,
가족사진 속에서 할머니 얼굴만 도려내면 그 자리는 누가 메꾸나요?"
우리 할머니의 과거가 그리 문제라면,
인신매매 살인범이었던 오빠의 장인어른 문제는 왜 함구하세요?
그리고 지금도 인신매매 살인집단 두목인 오빠 친구 김씨에게는 왜 함구하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래요? 도대체 저의가 뭐예요?"
오빠는 자신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 동생들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무엇이 어째? 저의라고? 그게 우리 집안 일이냐? 너 주꼬시퍼?"
이윽고 그는 흥분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얘야 과거사를 먼저 정리하지 않으면 미래로 갈 수가 없는 거란다.
정리할건 정리해야지.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하겠니?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해서 우리가 지금도 이모양 이꼴 아니니?
가족간에 화합을 도모하려면 과거사가 먼저 정리되어야 하는거란다.
집안이 망해간다는 핑계,애들 교육 핑계,동네망신 핑계... 이런건 핑계일뿐이야.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 이 일을 하는거란다."
찬바람이 휑하니 귓전을 스치고 있었다.
그 일로 온 집안이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 초여름의 일이었다.
집안에서는 새벽부터 하루 종일 울어대던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는다.
쉰 목소리의 울음소리가 가끔씩만 들릴 뿐이다.
바로 옆 고속전철에서 이따금 들리는 굉음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해는 저물고 암흑이 드리워가는 늦은 이 시각...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을 찾아 분주한데,
지금도 그들은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었다.
가끔은 얼굴도 붉히고,삿대질도 하면서.
벌써 다섯달째.....
집안 식구들은 어느새 두 패로 갈려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고함 섞인 토론을 하고 있다.
주제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을 앨범에서 긁어낼 것이냐 말 것이냐 라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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