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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집에 들어오면 누군가 집을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새집 화장실 변기에 빨간 글씨로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쓰여 있었다. 가끔 음식물 국물이 현관문 앞에 엎질러져 있고, 수도 없이 이상한 전화가 걸려 왔다."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숨겨진 딸로 소문나 당시 세상을 들썩였던 김진아(38·가명)씨는 극심한 도청과 감시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다. 인터뷰 당시에도 김씨는 주변 사람들을 무척 경계했다. 건장한 남성이 곁에 앉으면 귓속말로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이다. 다른 곳으로 옮기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씨가 도청과 감시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는 무엇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잘 나타나 있다. 김씨는 자신의 아파트에 가구 한 점 들여놓지 않았다. 139㎡형(42평) 아파트는 텅 빈 집이었다. 현관에는 철망으로 된 보조문을 더 달았다. 김씨는 "혹시 누군가가 쳐다볼까 봐 창문을 온통 하얗게 페인트칠 했다. 빛조차 들어오는 게 싫어 500만원을 들여 나무 창문을 달았다.

또 도청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낮엔 전압기도 내린다. 전자 제품 안에 도청 장치가 있을까 두려워 텔레비전 외에는 모두 버렸다"라고 말했다. 휴대폰은 물론 집 전화기도 없다. 인터폰도 차단해 경비원도 그를 호출할 수 없다. 집 앞 초인종은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철저히 외부와 차단한 생활을 하고 있다.

김씨가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0년 6월부터. "어머니(김미희·가명)가 자살한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시비를 걸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앞집 아주머니가 '어디 갔다 오느냐, 왜 이제야 들어오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김씨는 "어머니가 왜 자살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라고 물으며 당시를 더듬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타살당했다라는 소문을 염두에 두었는지 "어머니는 자살한 게 맞다"라며 "어머니에게 자식은 나뿐이다.

어머니 소원은 나를 김 전 대통령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것뿐이었다. 이 일 때문에 정대철 전 의원의 어머니인 이태영 박사(1998년 사망)와 김승우 신부(2004년 사망) 등과 자주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는 그 일이 여의치 않자 수 차례에 걸쳐 자살 소동을 벌이며 괴로워했다. 어머니가 쓰러져 고통스러워 할 때마다 어디가 편찮으신지 몰라 우황청심원·아스피린 등 갖가지 약을 다 사다 드리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던 어머니는 결국 아파트 욕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다. “원래 화를 잘 내는 어머니는 베란다 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주 자살 소동을 벌였다.

자살 당일에도 ‘그냥 저러시다가 말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자살 소동을 벌이다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잠옷 끈으로 목을 졸라 한 많은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씨는 여의도의 한 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벌어졌던 이상한 광경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성당 지하에서 친인척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그런데 어머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플레시를 터트리며 적나라한 어머니의 사진을 찍었다. 비록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지만 많은 남자들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평생을 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사셨다고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들 앞에서 벗고 있어야 했다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16년 전에 산 작은 곰돌이 인형 하나와 아파트 창문에 날아오는 비둘기떼를 벗 삼아 달랜다”는 김씨는 날아오는 비둘기가 가엾어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벌금을 내면서까지 음식을 부스러뜨려 비둘기들에게 나눠 준다.

음식은 늘 밖에서 사 먹는다. 그것도 아침은 굶고, 점심도 점심 시간이 지난 2~3시쯤 먹는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를 피해 아파트 주변 식당들을 번갈아 가며 사 먹는다. 저녁은 밖에서 음식을 포장, 집으로 가져가 먹는데 늘 비둘기에게 줄 양까지 고려한다.

이런 생활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한다. 한 이웃은 김씨에 대해 "인사도 잘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러나 늘 사람을 경계한다. 베일에 싸여 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어머니처럼 여러 번 자살할 생각도 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똑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다시 한 번 간곡히 원했다. “나의 출생과 관련,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미국으로 가고 싶다."

●국정원 DJ 딸 도청

2000년 6월 초. 김은성 국가정보원 2차장은 믿기지 않는 내용이 담긴 '통신 첩보'(도청 내용 문서)를 받아 들었다. 김 차장은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 곧바로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8국(과학보안국)에서 중요한 전문이 떴다"라고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김대중 대통령(DJ)의 숨겨진 딸로 소문난 김진아씨가 한 신부와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신부는 "미사를 집전하겠다. 우선 병원에 안치해 놓으라"고 했다는 것. 임 원장은 “이런 사실이 누설될 수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라”고 김 차장에게 신신당부했다.

2007년 8월 16일 검찰이 입수한 2005년 국가정보원 불법 감청 수사 기록에 생생히 그려져 있는 장면이다. 당시 DJ는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계기로 유력한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다. 국정원은 이런 상황에서 김씨 어머니 자살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면 갖가지 억측이 나와 노벨 평화상 수상에 악재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DJ의 숨겨진 딸 소문은 이처럼 국가 최고 정보 기관이 직접 도청하고, 국정원장에게 직보를 해야만 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와 관련,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김진아씨가 누구인지 모르다. 도청한 사실이 없다"라고 밝혔다.

글·사진 이예진 기자 [[email protected]] 655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