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왕자들을 처음 만난 곳은 신천 초대소에서였다. 그들이 아직 어렸을 때였는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왕자들은 우리 서기실 직원들과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눴다. 정운 왕자는 나와 악수할 때 험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왕자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김정일은 부인 고영희를 매우 신뢰하는 것 같았다. 부인을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고영희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가거나 도쿄 디즈니랜드에 간 적도 있다고 했다.
고영희의 요리 솜씨
창성 초대소에 머물 때는 고영희 부인이 직접 만든 메기 요리가 한 번쯤은 식탁에 오른다. 그 맛은 아주 일품이다. 밤의 연회가 끝나면 우리는 두 조로 나누어 메기를 낚으러 간다. 낚시는 아침 6~7시까지 배 위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많을 때는 대여섯 마리나 잡지만, 두세 마리밖에 낚지 못할 때도 있었다. 메기는 하루나 이틀에 걸쳐 흙을 다 뱉어내게 한 뒤 부인이 직접 요리했다.
하루는 부인이 만든 메기 요리를 먹고 있는데 김정일이 말했다. “후지모토, 일본에도 메기 요리가 있을 거야. 어떤 요리인지 일본에 가서 보고 와.” 나는 일본에 한 곳밖에 없다는 신오쿠보의 메기 요리 집에 가서 코스 요리를 8mm 비디오로 찍어왔다. 그리고 요리집 주인에게 부탁하여 메기 20kg을 얼음에 채워가지고 돌아왔다. 북조선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즉시 평양 8번 연회장 철판구이 코너에서 메기 샤브샤브를 내놓았다.
김정일은 매우 흡족해하는 모습으로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더니 “일본 메기는 껍질 색이 달라. 새카만 색이야”라고 말했다. 아무튼 메기 요리에 대한 김정일의 집착은 대단했다. 메기 샤브샤브에 맛을 들인 뒤 81과의 요리사들 네댓 명을 신오쿠보의 그 식당으로 연수를 보냈을 정도다. 메기 요리 외에 부인은 옥수수를 원료로 한 ‘강냉이 국수’라는 냉면도 만들었다. 여름철 더운 날에 먹는 냉면은 정말 맛있었다.
김정일 가족의 전용기 ‘216’
1993년 나와 김창선은 요리사와 웨이터를 각각 세 사람씩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다. 김정일의 가족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에 들를 예정인데, 그 시간에 맞춰 기내로 도시락을 넣어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모스크바에서 빌린 맨션의 부엌은 너무 비좁아 일을 할 수 없었다. 급한 김에 북조선 대사관의 넓은 주방을 빌리기로 했다.
도시락은 게맛살 초밥과 은대구 조림을 메인 요리로 하고 닭튀김, 야채 샐러드, 다랑어 튀김, 계란말이, 유부초밥 등을 곁들었다. 다 만들고 나니 새벽 1시가 되었다. 우리는 아침에 모스크바 공항으로 나갔다. 김정일 전용기 ‘216호’(김정일의 생일이 2월 16일이라 붙인 이름)가 도착해 있었다. 내가 216호기를 타보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기내에는 넓은 라운지와 같은 공간이 있고 개인 방도 몇 개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평양까지 가려면 약 아홉 시간 걸린다. 나는 그 동안 왕자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이제 점심시간도 다 되었으니 슬슬 도시락이나 먹자는 말이 나왔다. 맛에는 자신이 있지만, 가족들이 실제로 맛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평양공항에 도착했다. 216호기는 일반 터미널 반대쪽에 위치한 216호 전용 터미널로 향했다.
공항에는 김정일이 직접 마중 나와 있었다. 고영희 부인은 도시락이 매우 맛있었다고 김정일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도시락 통은 꼭 유골 단지 같았어요.” 내가 그 날을 위해 일부러 최고급 3단 목제 도시락 통을 일본에서 주문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유골 단지로 보였다니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나를 감동시킨 정운 왕자
그 후 나는 다시 한번 216호를 탈 기회가 있었다. 1995년 9월, 내 여권을 재발급 받아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일본에서 신청하면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번에는 스위스에서 발급받기 위해 제네바로 갔다. 놀랍게도 스위스 영사관에서 여권을 신청하자 불과 나흘 만에 발급되었다. 여권을 받아 북조선에 돌아가려는데 김정일이 전화를 걸어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김창선과 합류하라고 했다.
이틀 후 제네바 공항에 가서 새 여권을 보이자 출입국 관리국 직원이 힐끔 보기만 하더니 OK라고 했다. 일본 여권은 본래 유럽에서는 프리(free pass)패스였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아닌 북조선에서 왔기 때문에 여권에 꼭 도장을 받아야 했다. 이상하게 여기는 출입국 관리국 직원을 겨우 설득하여 여권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체코슬로바키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공항 로비에서 김창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타고 북조선으로 돌아갈 비행기는 216호기였다. 비행기 안의 로비에는 마작놀이를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즉시 마작놀이를 시작했다. 마작은 평양에서도 두어 번 해본 적이 있다. 김정일과 부인, 그리고 정명(?)이라는 사람과 내가 한 멤버였다. 김정일은 한때 일본식 마작을 배운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김정일은 ‘뻥’이나 ‘엎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식으로 하기 때문에 곧 ‘뻥’이나 ‘엎어’를 한다. 리치나 후리텐도 거의 없다. 김정일은 그런 중국식 마작을 재미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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