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연 > 자유게시판 > [좌파 박멸]아름답다 못해 황홀한 落照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가끔 까닭도 없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이따금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속이 답답한 사람들에게는 변산반도 여행을 권하고 싶다.

변산반도는 전북 부안에 있어 수도권에서는 무척 먼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일단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하면 두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므로 가볍게 떠나는 하루 여행지로는 적합한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변산국립공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공원으로 서해안의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내소사, 직소폭포, 월명사, 봉래구곡, 개암사 등이 있는 내변산은 물론이려니와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외변산의 해안도로 주변은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

변산반도국립공원을 모두 돌아보는 데는 적어도 3, 4일이 걸린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외변산을 돌아보는 것은 하루면 충분하다. 특히 변산반도 끝자락에 있는 격포항은 조선시대에 전라우수영 관할의 격포진(格浦鎭)이 있던 곳으로 인근 해변에는 숨어 있는 예쁜 풍경들이 많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서해안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부지런히 달리면 두 시간도 채 못돼 부안에 닿게 된다. 부안IC에서 빠져나와 30번 국도를 타고 줄포.격포 방향으로 달리다가 변산해수욕장 가는 길로 접어들면 비릿한 갯내음과 함께 눈앞에 바다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닷가에 자리 잡은 어촌의 아늑한 풍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든다.

계속 길을 재촉하면 오래지 않아 송림이 울창한 고사포해수욕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에서부터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라 할 수 있는 변산반도의 해안도로가 시작된다. 내쳐 길을 달리면 썰물 때 길이 열리는 하섬 바닷길과 어선 몇 척이 올망졸망 떠 있는 격포항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이곳 격포항 주변에 서해안 최고의 절경이라 할 수 있는 채석강과 적벽강이 고즈넉이 숨어 있다.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은 이름만으로는 강으로 오해하기 쉽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채석은 여러 가지 빛깔의 고운 돌을 뜻하고, 적벽은 붉은 벽을 뜻한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은 격포항 바닷가에 돌출되어 있는 높은 절벽을 가리킨다.

채석강은 실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노니다가 취흥에 겨워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중국의 명승지다. 그런데 채석강의 암벽이 그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적벽은 중국의 양자강 남안에 있는 붉은 바위로 이뤄진 절벽 이름이다.

중국의 삼한시대에 촉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 연합군이 위나라의 조조군과 큰 전투를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적벽강의 절벽이 그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채석강과 격을 맞추기 위해 붙인 이름일시 분명하다.

채석강은 ‘변산8경’의 하나로 격포항 남쪽에 연해 있는 층암절벽과 그 일대를 가리킨다. 수억 년에 걸친 바닷물의 침식작용으로 깎인 절벽은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밑에서 책 몇 권을 빼면 곧 와르르 무너질 듯 마냥 위태롭다.

7월에는 절벽 위에 진홍색의 참나리 꽃이 무리지어 피어난다. 그리고 밀물 때면 절벽 밑이 바닷물에 잠기지만 썰물 때가 되면 절벽의 바로 아래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닭이봉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칠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채석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름휴가철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는 것이다.

채석강 바로 옆에는 격포해수욕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부근에 횟집이 많아 휴가철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몰린다. 그래서 변산반도를 찾은 사람들 대부분은 채석강에서 머물다가 서둘러 발길을 돌린다.

채석강에서 불과 2km 남짓 떨어진 곳에 채석강 못잖은 비경이 숨어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다. 그러나 변산반도까지 가서 적벽강을 보지 않고 돌아온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채석강보다는 호젓한 적석강이 훨씬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채석강을 돌아보고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나지막한 언덕배기 아래 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죽막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을에는 해풍을 막기 위해 심은 후박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사실 채석강과 적벽강은 이 마을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다.

예전에 이곳 주민들은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에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민박촌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채석강 일대에 대형 리조트와 숙박시설이 많이 들어서면서 마을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걸려있는 ‘민박집’이라고 쓴 빛바랜 간판이 몹시도 허랑하다.

적벽강은 죽막마을 북쪽에 연해 있는 해안 절벽 일대를 가리킨다. 이름 그대로 붉은색의 암반과 기묘한 형상의 절벽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석양 무렵에는 적벽강의 바위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채석강 앞바다의 물이 탁한데 비해 이곳 앞바다의 물은 무척 맑다. 두 지역은 한 해안선에 연이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채석강은 흑갈색의 퇴적암으로 되어 있고 적벽강은 붉은색의 화성암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죽막마을에서 길을 나와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좁다란 오솔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용두암이라는 절벽 위에 허름한 당집 하나가 오도카니 서 있으니 곧 ‘수성당(水聖堂)’이다.

수성당은 서해의 수호신인 ‘개양할미’를 모신 당집이다. 전설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딸만 여덟을 두었는데 딸 일곱을 칠산바다에 있는 일곱 개의 섬에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이곳 해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서해를 지키는 해신이 되었다고 한다.

개양할미는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이곳을 지나는 배들를 보호한다고 한다. 그래서 죽막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풍어와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개양할미를 위한 해신제를 올린다고 한다.

1992년에 전주박물관에서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발굴된 유물로 보아 이곳이 선사시대 이래로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온 장소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또한 수성당이 있는 용두암 옆에는 침식작용에 의해 커다란 틈이 벌어진 여울골이라 불리는 바위절벽이 있는데 절벽 틈으로 끊임없이 파도가 넘나든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 개양할미가 이곳에서 걸어 나가 서해바다를 열었다고 한다. 수성당과 여울골에 얽힌 개양할미 전설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변산의 낙조 가운데 여울골 절벽 틈으로 바라보는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작가 몇 명이 아름다운 낙조의 풍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여울골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적벽강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높이 약 30m에 이르는 나지막한 절벽이 나타나는데 그 아래에 용굴이라 불리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몽돌이 깔린 조그만 해변이 이어진다. 몽돌해안 주위에는 주상절리처럼 단면이 6각형인 서까래 묶음같이 생긴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바닥에는 형형색색의 조약돌이 호박씨처럼 박혀 있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무척 신비한 느낌을 준다. 동굴 속에서는 당장에라도 긴 잠에 빠져 있던 공룡이 벌떡 일어서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에도 불구하고 적벽강 일대는 몇 몇 낚시꾼들이 조용히 낚시를 드리우고 있을 뿐 한여름에도 마주치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몹시 한적하다.

어떤 사람들은 해질녘의 저녁노을을 조용히 바라보면 삶을 관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변산의 낙조는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낙조를 보기 위해 변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해가 칠산 앞바다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면 하늘과 바다가 온통 진홍색으로 물든다. 해가 바닷물 속에 서서히 잠기며 주위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장면을 보고 그곳을 떠나도 결코 늦지 않다. 변산에서 보는 낙조의 장관은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외변산의 해안도로를 달리며 이따금 발길을 멈추고 푸른 바다와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 그리고 그물질하는 고기잡이배들을 바라보노라면 꽉 막혔던 가슴이 펑 뚫리는 듯 시원해질 것이다. 게다가 몽돌해안에서 조약돌로 물수제비를 뜨거나 바다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나면 일상에서 쌓인 피로가 모두 풀릴 것이다.

자, 지금 까닭 없이 가슴이 답답하다면 잠시 일을 접어두고 무작정 변산으로 떠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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