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냐, 동원이냐
다 지난 이야기지만, 노무현 후원회장 이기명씨가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지요. 용건은 노무현을 띄우는 책을 한 권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데다가, 정치권의 부탁으로 특정 정치인을 찬양하는 책을 쓰는 것은 글쟁이의 윤리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강준만씨야 이왕 베린 몸, 그 분에게 부탁해 보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그 후에 노무현에 관한 강준만의 두 번째 책이 나왔지요.
그후로 노사모던가, 아니면 노무현 캠프 사람이던가, 책을 만드는데 글 한 꼭지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번엔 '좌파의 입장에서 보는 노무현'이라는 주제라고 하더군요. 이 역시 거절하면서, "내가 글을 쓰게 되면, 결국 노무현에게 투사된 정치적 환상들을 깨는 내용일 텐데, 지금 당신들이 가진 환상이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기에, 굳이 그것을 깨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환상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내 나름대로는 호의를 표한 것이지요.
그후, 이분들의 환상은 날로 커져만 가더군요. 그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도 솔직히 좀 괴로웠습니다. 저건 아닌데,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스스로 좋아서 환각제를 먹는 사람들을 어떻게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후 노무현 캠프는 주로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선거광고도 존 레논의 '이매진'이 흐르는 가운데 노무현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여주는 등, 논리가 아닌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흐르더군요.
이성의 스위치를 내린 채 싸구려 감동을 남발하여 뜨거운 정념을 달구어 이를 투표의 엔진으로 삼는 거대한 움직임. 이를 보면서, 뭐랄까, 어떤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더랬습니다. 이게 과연 정치인가... 술 깨고 나면 취중의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지듯이, 저 환상이 깨어지면 도대체 그 수치심과 민망함을 어떻게 견디려고 저러나. 하지만 이들은 노무현에게 그에게 넋놓고 열광했던 것을 부끄러워 할 만큼 섬세한 감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요.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 아직 도취가 안 깨서 그러는 걸까요?
이들의 집회 장면은 흡사 교회의 부흥회를 연상케 하더군요. 노란 목사들의 뜨거운 설교.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아멘' 소리. 그들의 볼에 주르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이 놈 저놈 경쟁적으로 쏟아놓는 간증들. 나 길 잃고 헤메다 노짱을 만나 참 생명을 얻었네... 폐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보내 온 희망돼지는 지금 청와대 안에 기념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요? 그 분은 노짱이 나중에 측근비리와 불법자금으로 물의를 빚으리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 중에는 노짱이 썩었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그런 사기극을 편 정치꾼들도 있고, 오로지 한나라당 타도에 목숨 건 정치 중독자들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이 사람들 생각했다면, 검은 돈, 단 한 푼이라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왜? 그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지지해준 사람들을 능멸하고 모욕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반드시 더럽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다. 정확하게 자기가 더러운 만큼 정치도 더럽게 하는 거죠.
노무현을 대통령 만든 것을 저들은 '참여' 정치라 부릅니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겠지요. 결국 알량한 액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기부를 했고, 수고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그렇게 하여 자기들 힘으로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노무현 당선에 50%가 필요했다면, 그들이 기여한 것은 실제로는 2%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48%는 그들의 힘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조직의 힘이었지요.
그것을 '참여'라 불러야 할까요? 그들의 참여가 노무현의 정책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들의 참여가 민주당/우리당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들의 참여가 정권의 통치와 정당의 운영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낳았던가요? 제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아니, 이건 저만의 판단이 아닐 겁니다. 노무현을 당선시켰지만, 그의 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그가 속한 당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면, 이것을 과연 '참여'라 부를 수 있을까요?
유시민씨를 봅시다. e-party 위원장직에서 물러났지요? 집단으로 데리고 들어간 개혁당원들은 우리당을 바꾸는 데에 지금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공천 30%, 경선 70%라면 어차피 우리당 소속 의원들의 자리는 건드리지 못한단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뭘 개혁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구 개혁당 사람들이 우리당 내에서 과연 그런 개혁의 주체가 될 주제라도 되나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당 내에서 그들의 역할은 딱 하나, 유시민/김원웅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 뿐입니다.
듣자 하니 민주당에서 달랑 한 석, 네티즌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 비례대표를 주겠답니다. 우리당에서도 아마 따라 하겠지요. 그 동네에서는 벌써부터 이거 물려고 신경전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서영석이 정치하면 어디가 덧나나'라는 문장은 과연 반어법일까요? 반어의 반어, 즉 반어법의 형식을 빈 직설법일까요?
이런 게 '참여' 정치입니까? 정당에서 던져주는 뼉다구 하나 받아먹고, 계속 꼬리나 살랑살랑 치는 게 참여정치입니까?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봅시다. 과연 노짱의 지지자들은 정치의 '주체'가 되어 '참여'를 한 걸까요? 아니면 이미지 정치의 '객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동원'이 된 걸까요? 다시 한번 묻지요. 그들은 참여를 한 걸까요? 아니면 멋지게 동원을 당한 걸까요? 그 거대한 노란 물결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친애하는 황건적 무리들은 이런 지적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얘기니까요. 또 이런 얘기 한다고 그 표가 이 동네로 올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이쯤에서 한번 자신들이 내건 '참여 정부'의 슬로건이 얼마나 진정한 것인지 냉정하게 돌이켜 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환멸을 느끼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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