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야당시절 직접 자기 손으로 책을 많이 썼다. 그의 정적들도 그의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이 대필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거기엔 한반도가 거대한 중국의 한쪽에 붙어있으면서도 신라통일 이후 1300년 동안이나 ‘중국화’하지 않고 단일민족·단일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민족의 ‘자기 보전 능력론’이 반드시 강조돼 있다.
DJ는 몽골민족의 원(元)왕조, 만주족의 청조(淸朝)가 흔적도 없이 중국화되고,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들이 중국화의 길을 걸었던 사실을 적시하며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굴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만일 조상들이 그런 지혜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목숨 걸고 로마군에 무모한 저항을 하다가 2000년 동안 세계를 떠돌아야 했던 유대인 신세가 됐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DJ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대응했던 우리 민족의 자기보전 능력에 대해서도 극찬하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이래 45년 해방까지 40년동안 조국해방을 위해 무장투쟁을 한 식민지 민족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해방된 나라치고 이토록 철저하게 식민지 유산을 간직하고 개혁과 변화를 거부한 나라도 그 예가 없을 것”이라고 통탄하며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 청산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안타까워하는 일반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DJ는 98년 대통령에 취임하자 주변으로부터 친일파 청산에 나설 것을 권유받은 일이 있다. 어느 오랜 지인(知人)이 DJ를 만나 “이승만 박사가 하지 못한 친일청산을 하면 역사적인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건의한 적도 있다. 그러자 DJ는 눈을 지그시 감고 듣다가 “그래 알았네”라며 넘어갔다고 한다.
DJ도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문제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뿌리쳤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청산건의도 주변에서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지만, 기념관 설립제의로 허를 찌르며 덮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일에 매달리다간 자신의 임기내에 진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그런 일이 시대적 과제도 아니었다. DJ의 부정적인 유산을 떠올리다가도 그의 명석한 판단력에는 매혹된다. 이 정권에 교훈적이다. 정권은 자기 할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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