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과 합법의 차이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문화 유산을 답사한 책으로 유명해진 학자다. 답사를 어떻게 했는지, 짓밟고 다녔는지, 그렇지는 않았겠으나,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짓밟는 일이다. 그럴 자격도 없는 자의 계획된 소행이므로 짓밟는다고, 나는 말하고 있다.
그는 광화문 글씨에 “살기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소름이 끼친다고, 미술 사학자 유홍준의 미학적인 느낌이 그렇다 한다. 단 이유는 하나, 박대통령의 글씨이기 때문이다. 현판이 그에게 살기를 쏘았다는데 그가 그 자리에서 혼절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어쨌든 어느날쯤 나타나 현판에게 똑같이 살기를 쏘아붙이며 “이 현판아, 내가 문화재청장이다”라고 큰소리쳤음직한 그가, 문화재 현판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는 그가 풍차 앞의 돈키호테는 아닌 것이다.
또 그가 현판에게 쏘아붙이는 살기가 탑골공원의 삼일문 현판을 박살내던 무리들과,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을 넘어뜨려 끝내 없애버린 무리들의 그 눈빛, 그 살기와 다른 게 무언가. 똑같다. 그런 눈빛의 문화재청장이니 광화문 현판을 향해 호령할 만도 하긴 하다.
다른 점은 탑골공원과 문래공원의 경우는 문화재 또는 공공 기물 훼손의 불법 행위요, 유홍준은 당당하게 제도권의 합법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의 묘미가 바로 여기 있다.
■노무현=정조라는 등식
짜고 치는 고스톱, 즉 코드가 맞는 현장으로 가보자.
“대통령님은 조선시대 정조 임금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유홍준)
“내가 어떻게 정조의 격을 따르겠습니까”(노무현)
“세가지가 닮았습니다. 첫째가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것, 둘째는 천도(遷都)를 추진하는 것, 셋째는 소장 학자를 대접하는 것입니다”(유홍준)
“정조를 잘 모르니 앞으로 공부 좀 해보겠습니다”(노무현)
지난해 10월 유홍준이 노대통령과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가 세운 규장각을 안내하며 이런 말을 나누었다 한다.
뜬금없는 ‘정조 닮은꼴’이라는 야리꾸리한 알랑방구에 대통령이 놀라면서 흐뭇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유홍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정조와 관련된 책들을 대통령에게 보내주어,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모범 사례를 확실하게 연출한 모양이다.
자, 그리하여 노무현=정조라는 등식에 따라 광화문 현판을 정조 글씨로 바꾸겠다고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말한다.
알다시피 광화문의 경복궁과 정조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1865년 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경복궁은 화재의 잔해로 남아 있어 정조가 살아 생전 구경도 못한 곳이다.
그런 경복궁 정문에 정조의 글씨를 넣기로 하는데, 그것도 써놓은 글씨가 없으니 짜집기해서 넣겠다는 것이 정조를 닮은 노무현, 즉 유홍준의 노무현=정조라는 등식(등신이 아니다) 발상인 것이다.
노대통령으로선 창덕궁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에 이어 마침내 광화문 현판까지, “그럴 줄 알았으면 붓글씨를 배우는 건데”라는 탄식과 함께 얼마나 뒤집어지게 감격스럽고 가상했을까.
■언감생심, 누가 박정희와 맞장 뜨는가
속된 말로 골때리는 유홍준의 처신은 잠깐 접어두자.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지금 노대통령의 처신을 보자 함이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일련의 작업과 박대통령기념관 백지화, 한일외교문서 공개 등으로 ‘역사 속의 박정희’와 맞장을 뜨고 있는 그를 보면, 한마디로 깜냥없다. 10.26영화나 광화문 현판 교체는 그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아닌보살하는데, 끊임없이 박대통령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 뻔할뻔자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해도 무슨 승산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청와대에 있다고, 대통령이라고 똑같은 대통령이 아니다.
과거사 청산은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문제는 박대통령 폄하를 넘어 환각으로 치닫는 ‘역사 매저키즘’이다.
지금 바깥 세상에, 외신(外信)에 등장하는 우리가 알 만한 나라들 중에 우리처럼 과거사를 학대하는, 굉장치도 않은 정치 소란을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 21세기에 이 세상 어느 나라가 전직 국가 수반을 그렇게 웬수처럼 모욕하고, 그것도 이 세상 사람도 아닌 역사 속의 인물을 그렇게 도리깨질하는가 말이다.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학대는 병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딸, 야당 대표 박근혜를 겨냥한 일련의 정치 공세라는 데는 더욱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라는 정적(政敵)을 죽이기에 총동원되는 국가 권력의 알량함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지금 국민이 원하는 정치 화두(話頭)는 “싸우지 말라.
제발 먹고 좀 살자”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가 무정쟁(無政爭)을 선언하고 민생 안정을 위해 대통령과의 회담 용의를 밝혀도 일언반구 대답이 없는 대통령에게 무슨 정치 도의가 있을 것이며, 무슨 허깨비 같은 상생(相生) 정치라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이라는 현판
이 나라가 국제사회에 당당히 등장한 것이 누구 때문인가. ‘대한민국’이라는 현판을 국제무대에 올린 것이 누구인가. 도대체 그 전의 대한민국은 어떠했고,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무엇이 다른가.
가난에는 인격도 없다. 가난을 벗고 사람다운 인격을 비로소 지니고, 생전 가져보지 못한 자부심을 가지고, 국가적 품위를 지닌 것이 언제부터인가. 지금 대한민국의 존재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나라다운 나라 ‘대한민국 현판‘은 박정희로 인하여 가능했다. ‘대한민국 현판’은 곧 ‘박정희 현판’이다. 광화문 현판을 지운다고 박정희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걸 떼어낸다고 박정희가 역사 속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니다.
광화문 현판 앞의 유홍준에게 가보자.
그는 전국의 역사 문화 유산을 답사하고 광화문 현판 앞에 서 있다. 당당히 서서 삿대질을 하고 있다. 자기가 문화재청장이라고. 그가 학자는 학자로되, 역사와 도덕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인격을 도야한 선비는 아니다.
그는 불뚝거리고 입심을 자랑하는데 선비는 그렇지 않다. 선비는 기회주의에 편승하지 않는다. 알랑방구를 뀌지 않는다. 곡학아세는 사이비(似而非)들에게 붙이는 말이다.
■‘박정희’를 답사한 유홍준
팩트를 이야기하자.
다시 말하는데, 유홍준은 역사 문화 유산을 답사해서 유명해진 사람이다.
6.25전쟁의 폐허 위에서 가난의 민생고(民生苦)로 허우적거리느라 조상의 문화 유적은 손댈 겨를이 없었다. 불타 없어지고 폐허화된 조상의 자취를 복원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유홍준의 문화 유산 답사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박대통령의 역사 인식과 실천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 금산의 7백의총, 임진왜란 관련 유적, 강화도의 유적들, 유관순, 윤봉길 의사 등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의사들의 사당 건립, 그리고 서울성곽과 전국 중요 성곽 보수 등. 또 세종대왕릉, 강릉 오죽헌, 추사 김정희의 고택과 불국사, 부석사 복원.
유홍준은 대학 박물관장을 지냈다는데, 부여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경주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 광주박물관을 지은 것이 박대통령이다.
그가 경제개발에 총력을 집중하면서도 그와 더불어 역사 문화 유산의 복원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높이려고 애썼기에 유홍준이라는 잔풀내기 날파람둥이라도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다리품을 팔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 유산을 답사한 유홍준, 그는 곧 박정희 대통령의 자취를 답사했던 것이다.
광화문 현판을 향해 호령하는 돈키호테 아닌 문화재청장 유홍준을 보며 느끼는 것은 배은망덕 정도가 아니다. 팩트를 팩트로 말하지 않는 위선(僞善)이다.
권력 앞에 깝신거리고 알찐거리는 지성(知性) 모독이다. 그리고 측은함이다. 그것도 벼슬이라고 꿰어차 밥술이나 먹으면 국으로 가만이나 있지, 망가져도 어쩌면 그렇게 망가지는가 하는 측은함이다.
■광화문 현판 누구도 손댈 자격 없다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 1위, 가장 업적이 많은 근대사의 지도자 1위, 여론조사 골백번을 해도 뻔할뻔자 1위 박정희에 대한 국민 정서에 반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누구도 거기에 손댈 자격이 없다.
상징적으로 ‘박정희 현판’은 곧 ‘대한민국 현판’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없는 근현대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가 없는 국제사회의 ‘대한민국 현판’이 가능하기나 한가 말이다.
정권은 바뀌어도 역대 정권은 연장선상에 있으며, 연대 책임을 함께 하는 것이 정치적 도의다. 이런 도의가 없는 정권, 과거사의 ‘긍지’를 젓 담아 버리려는 정권은 씨알머리 없는 역사의 이단(異端)이며, 용서할 수 없는 역사 파괴의 패륜(悖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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