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친북-용공도 조사하자”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19일 친북(親北) 용공(容共) 문제까지 과거사 조사 범위를 확대하는 것을 전제로 국회 밖에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역제안하고 나섰다.
박 대표는 이날 당 상임운영위원회의에 참석해 “광복 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할 때 우리의 선택이 옳았는지, 6·25전쟁 때 누가 침략을 지켜냈고 그때의 만행으로 누가 큰 피해를 봤는지 밝혀야 한다. 또 4·19혁명이 누구의 부정부패 무능으로 일어나게 됐는지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과거사 때문에 현재와 미래가 어렵다는 대통령과 여당의 시각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얘기가 나온 마당에 중립적이고 검증된 학자에 의해 대폭적으로 과거사를 짚어보고 교훈으로 삼자”고 말했다.
박 대표는 “5·16 후 산업화 과정의 공(功)과 과(過)는 무엇이며, 냉전시대에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할 때 누가 국가안보를 지켜냈고 누가 피해를 줬는지 이번 기회에 공정하게 규명하자”고 제안했다. 박 대표는 이를 위해 국회 대신 중립성과 전문성이 검증된 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독립적으로 과거사 진상 규명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19일 ‘포괄적이고 대폭적인’ 과거사 규명을 제안한 것은 여권의 과거사 규명 드라이브에 맞서 한술 더 뜬 승부수이다.
세계는 지금 지구 차원의 아젠더에 맞춰 ‘도하 라운드’ ‘인터넷 라운드’ ‘그린 라운드’ ‘블루 라운드’를 진행하고 있다. 향후 10년, 20년, 멀리는 100년 앞의 미래를 염두에 둔 프로젝트들이다.
2004년 8월 대한민국에서는 ‘과거사 라운드’가 막을 올리고 있다. 노무현씨는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과거 정리가 안 돼 미래로 가지 못한다”면서 과거사 청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박 대표는 과거의 약점이 있는 사람처럼 더 이상 수세에 몰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박 대표는 “당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과거사문제를 연관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라며 “아무런 부담을 갖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여권의 공격을 우려하지 말고 ‘배수의 진’을 치라는 소리로 들렸다고 당직자들은 말했다.
박 대표는 이런 결정을 당의 공식 라인을 통해 사전 논의하지 않았다. 그만큼 전격적이었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이날 사퇴를 계기로 한층 강화될 여권의 공세를 역으로 치고 나가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지난 며칠 사이 여의도연구소와 몇몇 측근들의 건의를 받고 정면 돌파 의지를 굳힌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표가 내세운 카드는 두 가지다. 우선 규명 대상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권은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으며, 역사의 공과를 다 함께 밝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 대표는 해방정국에서 좌익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 학살사건이나 6·25전쟁 당시 빨치산과 공산당 부역자들이 저지른 학살 사건, 분단 고착화 이후 북한의 무장공비 등에 의한 피해, 간첩사건 등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부정과 무능의 주체는 누구이고, 5·16 후 산업화의 공과는 무엇인지 따져보자”고 말해 유신시대 인권 탄압 규명에 주력하고 있는 여권과 견해차를 드러냈다.
박 대표는 또 국회 밖의 중립적이고 검증된 조사위 구성을 주장했다. 그는 “과거 전력을 봤을 때 국민 앞에 떳떳하고 중립적이고 전문 지식이 있는 인사로 (조사위원이) 구성돼 제대로 규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이런 강수를 결코 두고 싶어 두는 것은 아니라는 심정을 피력했다. 그는 대구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기남 의장 선친의 친일 행적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쟁거리가 될까봐 얘기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여야는 이처럼 과거사 규명이라는 원칙론에는 한 목소리를 냈으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수석 원내부대표 회담은 합의없이 끝났다. 열린우리당은 외부 전문가들로 국회의장 자문기구를 구성하고, 그 제안을 토대로 입법활동을 하는 국회 내 과거사특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은 외부에 독립 기구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북·용공까지 조사 대상에 넣자는 한나라당 요구에 대해서도 열린우리당 과거사 진상규명 태스크 포스 책임자인 원혜영 의원은 ‘모든 걸 열어놓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던 며칠 전 입장을 바꿔 “야당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는 식으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여야의 향후 협상은 명분 싸움에 치우치면서 순탄치 않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권 밖에서는 정치가 역사를 정략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지만, 이미 인터넷에서는 정치권 인사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친일 행적을 폭로하는 등 과거사 태풍이 불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흑백 논리와 편 가르기가 횡행하고, 명예 훼손 등 법적 공방도 양산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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