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선조의 지나친 의심과 견제로 인해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당하고, 의금부에 갇혀 고문까지 당해야 했던 이순신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며 동정하기를 한마음인 것처럼 한다. 나 또한 가장 큰 전공을 세우고서도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당한 끝에 백의종군에까지 내몰려야 했더 이순신을 생각할 때마다 열불이 치미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선조의 의심과 견제도 이해가 간다. 조선은 몽골과 왜구, 홍건적 등과의 싸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던 이성계가 신진사대부들의 후원을 받아 세운 나라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전장에서의 공으로 영향력과 세력을 기른 무장에 의해 세워진 나라인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예는 비단 조선의 건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북송은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이 싸우라고 내보내놨더니 뭇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무혈쿠데타로 세워진 나라였다. 삼국시대의 위나라는 황건적과 동탁, 이각 등을 무찌르면서 명망과 실력을 쌓은 조조가 후한을 뒤엎고 세운 나라였고, 다시 촉한을 정벌하고 요동을 평정한 사마의가 그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세웠다. 물론 이는 성공한 것 가운데서도 큰 것만 추린 것이다. 그 외에 명망과 실력으로 기존의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는 헤아릴 수도 없다.
설사 이순신에게 그러한 야망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성계를 조선의 첫임금으로 만든 것은 그를 추종하여 모여든 무장들과 신진사대부였다. 당 고조 이연으로 하여금 수나라에 반기를 들고 당나라의 첫임금이 되도록 만든 것도 그 아들인 이세민과 그 측근들이었다. 이순신이 끝까지 그런 야심을 갖지 않는다고 해도 이순신이 존재하고, 이순신의 영향력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의 사회와 제도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이순신을 떠받들고, 이순신을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항상 무시할 수 없는 압력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실력이 사람을 모으면 사람은 다시 힘이 되어 없던 야심도 만들어내고, 생각지도 않던 일들마저 쉽사리 이루어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모두 가능성이다. 이순신은 끝까지 그러한 야심을 품은 적이 없으니까. 그의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완고함과 고지식함은 그러한 권력을 위한 진흙탕과도 같은 더러운 싸움에 뛰어들기엔 너무나도 고고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가능성만으로도 왕조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선조로서는 이순신을 견제할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실제 조선 후기의 역사를 보면 그러한 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가 어떠한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바로 송시열이다. 이른 바 해동의 주자라 하여 송자라고까지 불리우는 인물. 유림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석학이기에 그 영향력을 이용하고자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가 도리어 조선의 왕조는 그로 인하여 왕권이 결정적으로 약하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사실 송시열의 영향력은 이미 효종 때에 이르면 왕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북벌이라고 하는 명분을 가지고서도 북벌의 불가함을 주장하는 송시열과 끝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이후로도 서인, 특히 노론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역대 왕조는 송시열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는 송자라고 하는 과분한 존호까지 내려 주었었다.
만일 효종에게 선조와 같은 권력이 있고, 선조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공공연히 송시열이라 하는 인물을 견제하여 제거할만한 추진력이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최소한 조선 후기 헛된 명분론에 빠져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할 시기를 놓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효종 이후 현종과 숙종은 그에 실패했고, 그 결과는 영정조의 중흥기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의 발호로 말미암아 조선이 멸망하는 이유가 되었다.
왕조국가에서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왕이었다. 관료들의 권력도 궁극적으로는 왕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왕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법과 제도로서 견제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거나 나라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던 절대권력자 국왕. 그런데 그런 국왕과 대등한 또다른 권력이 출현했다는 것은 권력의 분산이 아닌, 법조차 제어할 수 없는 절대권력의 증가를 의미한다.
조선의 멸망 원인은 무어니무어니 해도 양반관료들의 부패에 있었다. 물론 부패라는 것은 조선 전기간을 통해 조선조정을 고민하게 했던 문제였다. 문제는 조선 후기 조선의 국왕들에게 그 부패를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는 데에 있다. 공공연히 안동 김문과 풍양 조문이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아 부를 축적해도 왕권이 그를 처벌할 수 없으니 망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강희제가 그랬다던가? 신하들에게 "경들은 물러나면 돌아갈 집이라도 있지만, 짐은 물러나면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라고. 관료들이야 관직에서 물러나면 개인이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 얽매인 개인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국왕은 물러나봐야 상왕이다. 그들의 수입이라 하는 것도 대개는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고. 당연히 국정에 대한 자세가 달라 아무리 막나가는 국왕이라 하더라도 여자 문제나 무리한 원정으로 나라 말아먹는 일은 있어도 부정축재로 나라 재정 절딴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조직을 견제하려 노력하면 노력했지.
그런데 송시열에 대한 견제에 실패하면서 조선의 왕조는 사대부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졌고, 그로 인해 양반사대부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들의 특권은 조선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마저 무시해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순신이 송시열보다 100년 전에 그 자리를 대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정신이 다 아찔하다.
요즘 X파일 관련 문제에 대해 이건희와 삼성에 대한 옹호론이 나오고 있다. 국가경제에 기여한 바가 크니 용서해주자고. 나라경제도 어려운데 이건희와 삼성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 없으니 덮고 넘어가자고. 어찌되었거나 한국 최대의 재벌이고, 한국 최고의 기업 아니냐고. 한 마디로 공이 있고, 실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으니 법 밖의 특권을 인정해주자는 소리다.
아마 이 문제로 재판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래서 처벌이라도 받게 된다면, 같은 이유로 정치권은 사면을 요구할 것이다. 국민여론을 핑계삼아 정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경제를 챙기는 정부로서 아주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사면을 할 것이고. 지난번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져나왔을 때도 그랬으니까.
결론은 재벌의 특권화다. 법이 있고, 제도가 있고, 그 위에 재벌을 둔다고 하는, 옥상옥의 특권화다. 과거 조선의 양반사대부가 그러했듯, 어찌되었거나 공이 있고, 실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어, 나라에 도움이 되니 법이나 제도 같은 것은 잠시 미뤄둠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대한민국이라는 위에 올려두는 것이다. 송시열이 그러했듯, 송시열을 앞세운 노론이 그러했듯, 그럼으로써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위에 군림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규정한 법과 질서와 원칙을 깡그리 무시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하자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런 꼬라지 보고 있으려면 차라리 그 싫은 선조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미친 척하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가장 큰 실적을 내놓은 무장을 파직시켜가면서까지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 했던 고독한 군주 선조가 오히려 훌륭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선조였다면 저런 헛소리 따위 왕권을 위협하는 거라며 살며시 즈려밟았을 텐데.
잊어서는 안된다. 삼성은 기업이라는 것을. 공공복리보다 이익을 더 중요시 여기는 기업이라는 것을. 대한제국이 망했어도 양반은 살아남았듯이, 대한민국이 망해도 삼성은 살아남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강제로 끌려갈 때도 양반은 저만 잘 살면 되었듯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빈곤에 허덕여도 삼성은 이익만 구하면 된다. 그것이 기업의 속성이다.
삼성의 부는 삼성의 부일 뿐이다. 삼성이 이룬 성과는 삼성이 이룬 성과일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것일 뿐 대한민국의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구성원 개개인의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위해 그들이 대한민국의 상식과 원칙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대한민국 위에 두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이라 해도 조선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면 제거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무장이고, 아무리 공이 커도, 장차 조선에 위해가 될 수 있다면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물며 일개 기업에 불과한 삼성임에야. 기업의 총수에 불과한 이건희임에야. 송시열을 잘못 이용하려다가 결국 노론에 잡아먹힌 조선왕조의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참으로 우습다. 삼성이 이익을 얼마를 내든 그 이익 가운데 다만 몇 푼이라도 혜택을 받은 이들이 얼마나 된다고 삼성 이야기만 나오면 삼성을 지키기 위해 안달들인 것일까? 법을 어겨도. 상식과 원칙을 깨뜨려도. 그래도 삼성을 그 위에 두지 못해 안달들인 것일까? 심지어 상식과 원칙을 말하던 참여정부까지 말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특히 우리가 그다지 보고 싶어하지 않은 어두운 역사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를 피로써, 눈물로써, 처절히 가르쳐주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고 다시는 그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의미일 것이다. 조선이 그랬듯 또 대한민국마저 말아먹자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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