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최근호에 '아주 특별한 글'이 한 편 실렸다. 활발한 기고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문학평론가 정문순(35)씨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사실을 고백한 글이다.
이 글이 특별한 이유는 공인의 성폭력 피해사실이 실명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장애',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가해자 처벌이나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미완'의 사건이지만 정문순씨는 이 글을 통해 "아무리 큰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피해자 스스로 성폭력의 피해를 수용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에 대해 자신의 경우를 들어 역추적해가며 성폭력 사건에 있어 '완결'이란 무엇인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16년 전 일이다. 87년 대학 1학년, 정씨는 국문학도의 꿈을 안고 부산의 B대학에 입학했다. 정씨는 강의실 맨앞자리에 앉아 수업에 열심인 "유순하고", "착한" 여대생이었다. 당시의 자신에 대해 정씨는 "어른이 시키는 일 앞에 이견을 달 생각을 하지 못했고, 칭찬이라고 받으면 좋아했던 것이 그 무렵의 내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다.
교양과목을 듣기 위해 신청한 타과의 A교수는 수업시간에 "질펀한 성적 희언"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학생"이었다. 교수가 일을 도와달라고 자신을 "빈번히" 연구실로 불러 포옹을 하거나 사랑한다고 귀에 속닥여도 정씨는 이렇다할 반감을 갖지 못했다.
심지어 졸립다며 연구실 침상에서 잠이든 교수를 깨우러 갔다가 눈을 뜬 교수가 입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가 하나씩 사탕 빨듯 하던 상황에서도 정씨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던져진 교수의 무심한 시선. 정씨는 손을 씻을 생각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16년이 지난 지금 괴롭게 자문하고 있다.
"어이없게도 그 때 내 몸의 반응은 불쾌감이나 거부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교수님이 내가 좋아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을까? 그 상황을 떠올리면 몸에 뱀이 훑고 가는 느낌을 견딜 수 없는 지금의 나와, 그 때 숱한 포옹을 당하면서도 모욕을 느꼈다는 기억이 없는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갖지 못한 '유순한' 여대생
1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문순씨는 10여 차례에 걸친 교수의 성추행에 대해 "추호도 성적 교감이나 이성적 친밀감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설마 나쁜 생각이 있었겠나, 라고 생각할 만큼 무지몽매했다"고 말한다.
이어 정씨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신체 접촉에 대해 문제라고 인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오지 못했다"며 특히 남교수와 여대생이라는 권력관계를 강조하며 "상대가 굳이 힘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것 같다"고 말한다.
정문순씨의 글에는 유독 질문이 많다. 자문하고 자답하는 방식. 처벌받지 않은 가해자,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 즉 가해자가 '증발'해 버린 상황에서 정씨는 홀로 진실찾기를 하고 있다.
"그 교수 역시 나한테야 어른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수업까지 기꺼이 결석한 적도 있다. 훗날 만났을 때 교수가 나를 '착한 여학생'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도 빈말을 아닐 것이다.
물론 그건 나만의 경우가 아니라 대개의 학생들도 교수들에게는 말 잘 듣는 제자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교수의 행동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눌려 있었는지 모른다. 어린 학생에게 교수라는 존재는 하늘이나 다름없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드높은 권위라면 어린 여학생을 희롱하고도 반발은커녕 의심을 사지 않는 일조차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생에 대한 교수의 힘은 상식적인 판단조차 얼어붙게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 변명이나 합리화에 불과한가."
그리고 자각. 하늘에 구름이 끼었다 걷혔다 하는 반복 끝에 90년대 초 교수의 행동이 농락, 성폭력이었다는 판단에 이르자 그 때의 일은 더 이상 과거가 될 수 없었다. 동시에 부정해야 할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씨는 '내 몸은 아무렇게나 다뤄져도 좋은 것이 아니다', '내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사과를 받아내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다시 벽. "이제 와서 그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다시 오랜 고민과 망설임의 시간을 보냈다.
"남에게 어려운 말도 꺼내지 못하는 나다. 나의 소극성과 아둔함, 성폭력도 인지 못한 어리석음이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결코 억누를 수 없었고 찾아가 담판을 내지 않으면 해소될 것 같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일이 시원하게 풀리리라 기대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지지도 했다."
뒤늦은 자각, 하지만 가해자를 동정하는 피해자 신세
하지만 정씨의 착각이었다. '준비 없이'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가해자 A교수는 정씨를 '은사를 찾아온 제자'로 환대했고 '낯빛이 밝아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 웃는 낯에 정씨는 "내 몸을 왜 그렇게밖에 대우하지 못했느냐", "나를 노리개 취급한 것 아니냐"고 당장에 멱살이라도 쥐고 따지지 못했다.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면 그 때 일은 용서해도 좋지 않느냐는 생각이 몰려왔다. 까마득한 일을 꺼내면 교수가 얼마나 당혹할까 염려까지 해줄 지경이었다."
정씨는 가해자를 동정하는 피해자였다. "정작 가해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를 놓고 혼자서 분노와 연민을 널뛰기 하다가 몸이 축"나는 건 정씨 자신이었다. 또한 시간이 흘렀어도 정씨는 함부로 대해도 좋은 어린 여학생이었다. 남편과의 잠자리는 어떠냐고 묻는 등 성희롱은 여전했다.
그러기를 10여 년, '사과'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정씨는 작년초 가해자 A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라는 형식은 "사과는 제쳐두더라도 어쨌든 가해자가 알도록 해야 한다"는 당위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예의" 사이에서의 타협이었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습니다... 사과해주십시오"
정문순씨가 가해자 교수에게 보낸 이메일
다음은 정문순씨가 작년 2월 26일 가해자 A교수에게 보낸 이메일 중 일부의 내용이다.
○○○ 교수님께.
전화를 주신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린지 일주일이 지났다면 연락을 취하실 의사는 적다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제 전화가 그리 달갑지 않으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선생님께 편지를 보낸 지도 2년이 지났습니다.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에 찾아 뵙고 말씀을 드릴 것을 새삼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두어 번 직접 찾아뵙거나 전화를 드렸을 때, 제가 차마 말하지 못한 용건에는 편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략>
부인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대학 재학 중이던 때에 선생님으로부터 분명히 추행에 해당할 만한 일까지 당했음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껴안거나 제 손을 입에 가져간 일을 말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시에는 제 어리석음 때문인지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막상 그 기억이 저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일입니다.
선생님한테 사과의 말을 받아아 한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가끔씩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유사한 사례를 보며 가슴앓이를 적잖이 겪어왔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어도 삭이고 넘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이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방문했을 때 번번이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물러나오게 되더군요. 제 가족 일을 걱정해주시는 배려에 입을 여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도 선생님에게 제가 쉽게 생각되시는 건지, 저는 성적으로 유쾌하지 못한 발언을 몇 마디 들어야 했지요.
워낙 오래 된 일이라 선생님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리지도, 상처가 쉽게 아물지도 않습니다. 직접 뵙지 못하고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일이 선생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의 바람은 선생님과 관련한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저에게 사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과를 요구하는 두어 차례의 이메일에 교수는 묵묵무답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정씨는 육성으로라도 말해주기 위해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십수년을 속앓이를 해온 정씨에게 교수가 던진 말은 '소설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뜸 교수는 자신을 괴롭히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숫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취급이었다. 사과가 없다면 나만 알고 있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해주자 협박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찾아가겠다는 내 말은 거절당했다."
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도와주겠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씨는 "애초에 만나자는 말은 교수쪽에서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 만남의 내용은 정문순씨의 생각과 판이하게 달랐다. 교수는 "너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내가 만나서 도와주겠다", "네 마음이 평온치 못한 것 같은데 그 상처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적반하장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더니 끝내 교수는 만나주지 않았다. 정씨는 이 문제를 주변 몇몇 친구에게는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들이 던진 조언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냥 털어버려라"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털어지지 않았다. '나에게 왜 그랬냐'는 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혀있는데….
여성단체에 도움을 청해보았지만 "법적인 처벌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6개월 이내 신고를 해야 하고 1년이 공소시효다. 16년이 지난 이 사건은 교수의 사과도 법적인 처벌도 받아낼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결국 정씨의 글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고발장인 셈이다.
가해자의 실명이 아닌 피해자의 실명이 공개되는 '2차 가해'의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씨가 글을 남긴 이유. 최근 우리가 성폭력 사건을 숱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성폭력 사건이 늘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 피해를 떳떳하게 말하고 공론화시킨 피해 당사자들 덕분"이라는 점,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말해서 겪는 것보다 결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원고지 50매의 이 글을 쓰는데 정씨는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하루가 걸리기도 했다. 당시 나의 심정은 뭐였나, 교수는 왜 그랬을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들. 그리고 끝없는 자기 검열.
정씨는 글의 말미에서 어렵게 자신의 바람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사과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했다면, 모욕당한 몸의 기억을 완전히 과거로 보낼 수는 없더라도 여전히 잠복해 있다 불시에 나를 붙들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놓여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 때 교수가 던진 무심한 시선은 아직 내 주의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내 소극성과 피해자로서 줏대 없음에 대한 대가를 이제 그만 치르고 싶다는 생각, 과분한 것일까?"
정씨의 <특별기고>의 제목이 '성폭력의 기억, 자책과 분노 사이에서'인 이유이다.
집단적으로 대응하라
[전문가 조언]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덕화 상담원
교수와 학생이란 권력관계에서 교수의 성폭력에 대해 학생은 단박에 저항하거나 불쾌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피해자가 저항을 포기하는 것은 문제제기를 해도, 저항을 한다해도 인정받지 못하거나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돌아올 피해가 더 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피해자는 문제인식 자체를 스스로 차단한다. '나쁜 마음을 먹었을 리 없다', '성폭력이 아닐 것이다' 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는 법적 처벌보다 큰 상처의 치유가 될 수 있다. '나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나의 몸을 훼손할 수 없다'는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항하지 못한, 당당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성희롱의 경우 법적 처벌조항이 없다. 남녀차별금지법, 고용평등법 등으로 직장내 성희롱은 그나마 처리될 수 있지만 교수/학생 관계는 적용규정이 없다.
정문순씨에게는 같은 피해를 당한 여성들과의 대화를 권하고 싶다. 가해자 교수의 경우 분명히 제 2의 피해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동문들을 수소문해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 박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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