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일이다. 경험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일이겠지만, 예비군 훈련이란 어쩔 수 없이 불려나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한심스러운 연례행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리 저리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끌려다니는 시간때우기 행사는 안 그래도 곤혹스런 일상의 서민들에게는 정말 난감한 일이었던 것으로 성의를 다하여 무언가를 해볼수도 그런다고 마냥 늘어져 버릴수도 없는, 참으로 희한한 행사를 매년 한 두차례 꼬박 경험했던 적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훈련장에서 한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강연이 있다고 하기에 몰려 앉은 강당은 여느 때처럼 소란소란 산만하기 그지 없었는데 그런 장소에서의 강연이란 으례 반공이 아니면 준법, 그것도 아니라면 가정관리(이를테면 피임이니 뭐니 하는)가 고작이어서 별반 기대도 없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고, 소개된 여인의 이력은 역시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5, 60대 초로의 여인은 독립군의 자식으로 북한에서 태어나 중국과 동남아의 여러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피난(?)을 왔다는 것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예비군 훈련장인 탓으로 거기까지만 들어도 그 다음은 대충 앉아서 졸거나 옆 사람과의 잡담으로 시간은 그냥 지나가버리기 일쑤였고 또 너무 오래된 일이라 여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였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에 없다. 다만, 아직도 기억속에 있는 것은 여인이 그 흔한 반공이니 사랑하는 조국이니 하는 따위의 언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리고 강연이 끝나갈 무렵 의미심장하게 쏟아낸 몇마디 한탄의 소리였다.
"내가 이 나라에 발을 딛고 처음 느낀 것, 그리고 너무나 놀란 것은 이 나라에는 웬 욕설이 이렇게도 많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그러면서 자기가 들었다는 욕설의 종류와 내용을 몇가지 예로 들었는데, 거기에는 씨×이니 개××니 하는 정도의 욕설은 아예 포함이 되지도 않았다. 땀을 낼 놈, 염병할 놈, 오그라들 놈 등등. 여인은 거침없이 누구나 한번쯤은 익히 들어봤음직한 말들을 쏟아내면서나름대로 고생께나 하면서 이 나라, 저 나라 수없는 세월을 떠돌아 다녔지만, 이 나라만큼 욕설이 발전(?)한 나라를 본 일이 없다는 개탄으로 말을 마쳤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의 언어문화는 아무런 이유나 생각없이 욕을 내밸을 줄 아는 정도의 수준까지 발전하여 어떤 이는 욕이 섞이지 않으면 벙어리처럼 되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재미가 없다며 자리를 떠버리는 일까지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격한 말, 모난 표현이 아닌 평범한 말은 그 뜻이 통하지가 않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의미의 발전은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흔히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민족의 영혼이라고 한다. 유태인이 수천년 세월 민족을 잃지않은 원인이 그 언어에 있다고도 하고 한민족이 그나마 지금만큼 살고있는 까닭도 그 언어를 지킨 것에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처럼 중요한 언어가 이토록 마구 사용, 왜곡 발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몇일 전 광주지법 해남지원의 이승형 판사는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경우 피고인의 법정 부인에도 불구,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된 형사소송법 조항은 범행을 부인하는 법관 면전에서의 진술보다 검찰에서의 진술을 앞세워 유죄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는 이유로 검찰에서의 인권유린 우려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제청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수사인지 재판인지 그 실체가 불안스러울만큼 엉성하기 짝이 없는 우리 법조의 현실에서 한낱 촌구석에서 일하는 일개 판사가 그냥 그대로 파묻혀 지나쳐도 그만인 일로 문제 제기를 하였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신선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법조의 사법권 운용 실태는 정확하고 분명한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여, 검찰의 수사조서나 법원의 판결문은 모호하기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도대체 뭐가 뭔지를 알 수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현상은 물론 우리 법원의 급박하고 또 열악한 현실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정확한 사실조사 자체가 없다는 사실에 보다 더 큰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수사조서나 판결문 등을 읽어보면 의혹과 모순을 그대로 감싸안은채 단지 검사가 수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사히 법원을 통과하게 되어 나라는 마침내 "사기꾼의 나라"라는 비아냥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 책임의 일단을 지니고 있는 일부 법관조차도 "법정은 거짓의 웅변장"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탄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사기꾼의 입장에서는 검사 한 사람만 속이면 나머지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 훨씬 살기좋은 세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이 나라의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규는 명백히 모순과 거짓을 비난하며 진실과 상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사기꾼이 살기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하여 만족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법원의 위증 및 무고 관련 판례들은 국가사회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갈 우려가 지나치게 큰 것이다. 가령 위증죄에 관한 판례는 단지 "법정에서 선서한 증인이 기억에 반하여 허위진술한 경우"만을 위증죄로 본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기억에 반한 것인지 아닌지는 무엇을 가지고 판단을 하겠다는 것인지가 우선 불명확하다.
가끔 이 나라안에서 최고의 학벌과 지위를 가졌다는 자들이 국회의 청문회에서 모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위증죄로 고발되어 법정에서 형사처벌받는 경우를 보고는 했는데, 그것은 결국 해당 진술이 객관적 사실에 반한 것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들로써 기억에 반한 위증이었음을 법관이나 국민이 알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증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관념에 불과한 기억에 틀림이 없다는 주장만을 가지고 엉뚱한 국민이 형사처벌되는 불상사가 계속되는 것은 우리 법조가 그 이름에 걸맞는 실질을 스스로 포기한 행위라 할 것이며, 그와같은 법원의 태도는 사실확인없는 스스로의 잘못된 행위를 합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 불과하여 사법불신을 조장, 강화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고도 거짓이 아니라는 허위진술은 객관적인 사실을 통하여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할 것임에도, 우리의 검찰 및 법원은 진상을 철저히 그리고 정확히 밝히는 데에 소홀히 해왔다. 국민적 관심이 큰 대형 사건에서조차도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기에 여념이 없는 검찰이나 법원이 힘없는 개인의 사건에 대하여 얼마만큼 진력하고 있는지는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운 것이며, 그 가장 큰 책임은 명백히 법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거짓과 욕설에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국민인지도 모른다. 제목은 잊었지만 어떤 영화에선가 너댓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걷고있던 의사 아버지가 조금전 아빠는 거짓말을 했어요,하는 아들을 향하여 "선한 의도로는 거짓을 말할 수도 있어"하고 답을 주던 장면이 있었다. 아직 분별없는 어린 아이에게 의사인 아버지가 내뱉을 수 있는 말 치고는 기막힌 것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이제라도 그 잘못된 풍토를 바꿔야만 하는 것이다. 사법권의 집행자인 판사, 검사라는 자들이 불신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주지는 못할망정 그를 악화 재생산하는 일은 이제라도 마땅히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합리성을 잃어버린 거짓과 모순이 판을 치는 한 이 나라에 욕설과 거짓말고 또 다른 무엇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학교에는 선생님, 집안에는 부모님, 법원에는 판사님, 강남에는 의원님 등 우리 세상을 차지한 것은 모두 그 "님"들이라 할 것임에도 도무지 진실과 상식을 밝히려는 건전한 말이 통할 수 없는 것은 이 사회에 욕설과 거짓을 뿌리고 키우는 원죄가 바로 그들에게 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좌다.
오늘 우리의 자랑스런 조국은 또 다시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그들은 또 다시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선진 대한민국을 외치려 하고 있으며 우리는 아마도 곧 대구의 참사도 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옆집 늙은이는 오늘도 손자들을 향하여 목을 놓아 외치고 있다
"이 땀을 낼 놈아!"
7513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