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사장 P씨에게 우편물이 날아왔다. 봉투를 열어보니 새빨간 글씨 가 눈을 찔렀다. 받아보
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색깔이었다. 문장도 색깔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빨간 고딕체로 된
우편물의 제목은 -강제징수 대상사업장 결정 통지서-였다.
빨간 글씨 는 또 있었다. 집행업무 항목이었다. -동산, 부동산, 채권 압류.매각,추심, 사업장 수
색, 체납사실 은행연합회 통보,관할 검찰청에 형사고발.-
사람이 극도의 긴장상태가 되면 뒷머리가 뻣뻣해진다. 온몸의 혈관은 수축되고 얼굴색이 변한다.
심장이 빨리 뛰고 가슴도 두근거린다. 눈동자가 커진다. 위·장·쓸개·콩팥 등 모든 내장이 긴장
상태에 빠지면서 내장운동도 정지된다. 숨관이 확대되고 호흡이 빨라진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된
다. P사장은 순간적으로 이런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형사고발 이라는 빨간 글씨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검은 글씨 가 적혀 있었다. 이러한 체납처분업무를 집행하는 직원에 대해 폭언, 폭행 또
는 협박하는 행위는 형법 제 136조(공무집행방해)에 해당되며 압류재산 등에 부착한 봉표(빨간딱
지) 등의 표식을 제거, 훼손하는 행위는 형법 제 140조(공무상 비밀표시 무효)에 해당하여. 다시
빨간 글씨 가 이어졌다. -형법상 제재가 따르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오니 불이익이 없도록 하시
기 바랍니다.-
빨간 글씨 는 이밖에도 -행정상 강제력에 의해 압류, 점유, 매각, 추심하여-, -은행 등 금융기관
과 신용평가기관에 대한 체납사실 통보절차와 함께 관할 검찰청에 대한 형사고발 조치가 병행하여
진행됩니다-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세금 체납 때문에 발급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 공단은 귀사를 체납보험료 강제징수 대상사
업장으로 결정하였음을 최종적으로 통지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빨간 글씨 가 국민연금을 내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날아온 -통지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 영등포지사장 명의
로 되어 있는 -결정 통지서-였다.
이 중소기업은 사업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직원들에게 봉급도 몇 달째 주지 못하고 있었다. P사장
자신은 벌써부터 봉급을 포기하고 있었다. 유일한 재산이었던 아파트마저 처분한 상태였다. 회사
문을 닫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P사장에게 날아온 -통지서-는 이처럼 살벌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할 봉급 은 지급하지 못해도 늙은 후에나 받을 수 있는 연금 은 제때, 그것도 꼬
박꼬박 납부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납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봉급을 받지 못해 속된말로 굶어죽은 뒤 에 연금이 나오면 어디다 쓸 것인
가.
-결정 통지서-에는 집행예정일자 가 수시 라고 되어 있었다. 언제 공단 직원이 들이닥칠지 모를 일
이었다. 부랴부랴 통지서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문의전화를 했다. P사장은 회사의 경영상태를 설명
했다. 폐업증명서를 첨부해서 사업장 탈퇴신고서 를 제출하라고 했다.
이 회사가 문을 닫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혹시라도 매출 계약이 이루어지면
직원들에게 밀린 봉급과 퇴직금이라도 지급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연금공단 의 -결
정 통지서-는 기다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공단 직원이 들이닥치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사무
실 집기 등에 빨간딱지 를 붙이는 일만은 곤란했다.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즉시 폐업을 하고 말
았다. 남은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얼마 전 세금과 관련, 눈길을 끄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국민 개개인이 세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금 해방일 이 3월 25일이라는 기사였다. 1월1일부터 3월24일까지 84일 동안 일해서 번 소득은 모
두 세금으로 내야한다는 얘기였다. 따라서 자신이 쓸 수 있는 소득은 3월25일부터 12월31일까지 버
는 돈뿐이라는 것이었다. 조세부담률을 따져서 계산한 기사였다.
그렇지만 이 기사는 잘못된 것 같다. 세금보다 훨씬 무서운 연금이 빠져 있는 것이다. 세금은 경기
가 나쁘거나 천재지변이 나면 납부를 유예하거나 가끔 면제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가 어려움에 처
한 기업이나 가계에 생색을 내는 것이다. 반면 연금은 반드시 납부해야 한다. 아무리 나중에 연금
으로 되돌려준다고 하지만 납부가 늦어지면 P사장의 경우처럼 빨간딱지 가 붙는다.
그렇지 않아도 연금에 대한 저항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네티즌들이 온통 연금을 비난하고 있
다. 정부가 생애 평균소득의 60%까지 받을 수 있는 국민연금 지급액을 2007년까지 55%, 2008년 이
후에는 50%로 낮출 계획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9%인 납부비율은 2030년에는 15.9%까지 인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연금재원이 바닥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납부해야 되는 금
액은 늘어나고 지급액은 거꾸로 줄어드는데 반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연금공단은 이처
럼 군림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확실하게 문닫도록 만들고 있다. 두 번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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