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
1. 한국역사에서 영남의 위상 철제 농기구가 한반도 남부지방에 도입되기 시작한 5~6세기 이래 오늘날 의 영남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가장 후진적인 지역으로 남아 있던 한반도 남부의 영남 지방이 유리한 농업 환경을 기반으로 한반도 역사에서 이후 가장 주목받는 지역으로 부상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성장이 가장 괄목할만한 변화였다. 농 경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신라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은 한반도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하여 중국의 선진 문물의 전파 속도가 가장 더딘 지 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신라는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 으로 왕국을 건설했던 고조선이나 고구려로부터 선진 문화를 전수 받았을 뿐이다.
농경사회로의 전환 이후, 신라는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중국의 선진 문물 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당대 최고 수준의 중국 문화를 직수입하는 등 발빠 르게 움직여 나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 결과는 한국 역 사상 최초의 통일 왕국의 건설로 나타났다. 이후 통일 신라는 7~8세기에 이르러 최전성기의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단일 축으로 한 동·서 문화 교류의 동쪽 정착지로서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기 에 이르렀다.
10세기 전반 무렵, 서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 세력에 의해 건국된 고려가 한국 역사의 두 번째 패자가 되면서, 영남은 또 다른 변 화 물결에 직면하게 되었다. 왕국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밀려나 버린 것 이다. 그러나 왕조가 교체되었다고 해서 천년 왕국 신라의 위세가 하루아침 에 사그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대로의 끝은 언제나 천년의 고도 경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따라 영남의 엘리트들이 상경하고 관료나 학자로서 성가를 드날렸다. 동경 경주는 수도 개경과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과 더불어 고려의 3대 도시 로서 이른바 3경(三京)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왕조가 위기 상황을 맞게 되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 부흥운동이 전개되곤 했다. 집권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대체 세 력으로서의 역할을 영남 세력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이 지역 출신 관료 학자들이 중국의 새로운 사상적 조류인 정주학(程朱學) 을 수용하는 데 가장 적극성을 띤 것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깊이 관련 되어 있다. 여말 선초의 왕조 교체 시점에서 구체제 옹호론이나 신체제 개 혁론 양대 진영의 핵심 사상가들의 대부분이 영남 출신 사대부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2. 영남: 인재의 창고
조선 역사상 최고의 인문지리서로 평가받는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중환만이 갖고 있던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영남이 ‘인재의 창고’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료들을 조선시대에서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영남 지역은 조선 건국 이후 절의적(節義的) 기질이 특히 강했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의 실천에 대한 관심을 각별히 강조하는 지역으로도 유명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 이래 집권 세력인 훈구파와 곧잘 충돌하는 양상을 띠었 다. 무오사화-을사사화에 이르는 60여년 간, 16세기 정치사를 결정지었던 훈 구파 대 사림파의 대결 국면에서 유난히 영남 출신 사대부들이 많은 피해 를 입은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림파는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훈구파를 몰아내 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대 개가를 이뤄냈다. 사림파의 핵심에 영남 출신들이 많았다는 것은 결코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방 출신에 의한 정권 교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 역사상 초유의 정치적 대사건 이었다. 근대 정당정치에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갖는 정치사적 의의보다도 사 림파에 의한 집권의 역사적 의의는 훨씬 큰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 중심을 영남 출신들이 메우고 있었다.
이후 사림파는 동·서인으로 분당한 이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끝없이 분열을 이어 나갔다. 이와 같은 다기한 분열의 최종 종착지는 서인-노론세 력과 동인-남인 세력으로의 분기였다. 노론세력은 서울·경기를 지역적 근거 로, 남인세력은 영남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의 후반부 300여년 동안 남인들은 재야세력으로 남았으며 그들의 지역적 근거지인 영 남은 집권세력으로부터 노골적으로 차별 받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남게 되었 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병폐랄 수 있는 영·호남 지역감정의 원조 격이 바로 조선 중·후기 이후 서울·경기와 영남 사이의 대결 구도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영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에 대항하는 재야세력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현대사에서 영남이 보여준 강한 재야적 기질은 이와 같은 역사적 성격에서 연유한 바 크다.
3. 독자들에게 드리는 당부 말씀
한국역사에서 영남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와 같기 때문에, 영남은 싫던 좋던 한국 역사 전체의 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 따라서 영남의 역사는 곧 한국 전체의 역사이기도 했다. 따라서 영남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영남은 역사적으로 두드러진 인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된 인물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토록 많은 인물들을 모두 다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 다. 시간이나 지면이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대구사학회’는 앞으로 1년여에 걸쳐 70여명에 달하는 영남 출신 인물 들을 영남일보 지면을 통해서 매주 소개할 예정이다. 이들은 멀리는 삼국시 대로부터 가까이는 최근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2천년에 걸친 영남의 역사에 두루두루 걸쳐 있다. 이들 중에는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도 있을 터 이고 아주 생소한 인물도 더러 눈에 띌 것이다. ‘대구사학회’는 이번에 대상 인물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인물에 대해서는 기존의 인식을 일신할 새로운 사실들을 언급하는 것에, 그리고 낯선 인물들에 대 해서는 모르는 사실들을 새로이 추가하는 것에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위인이나 선인 위주의 긍정 일변도의 반쪽 짜리 역사의 서술 을 경계하고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따라서 개 중에는 이후 역사의 흐름에 물꼬를 터준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도 있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악역을 담당한 인물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다 한국 역사의 사건 현장 그 자리에 있었 던 자들로, 이후 한국역사의 전개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들 이다. 독자들은 이들의 스토리를 접하면서 영남 출신 인물들이 당시 마주친 역사적 현장들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을 통해서 한국사 전체의 진행 방향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물 선정과 관련한 이러한 기준 때문에 반드시 언급해야만 할 인물임 에도 불구하고 제외된 이들도 많이 있다. 제외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선정 인물들보다 못하거나 혹은 역사적 비중이 떨어지는 인물이 아님을 독자들께서 깊이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대구사학회’에서는 위의 기획을 준비하면서 1년여에 이르는 기간 동안 회의를 거듭하면서 대상 인물들을 선 정한 바 있다. 그리고 영남 일변의 역사 인식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전국적인 명망을 가진 역사 연구자들에게 기사를 부탁했다. 신문 연재 과정 에서 집필자들이 혹 잘못 이해했거나 오해한 부분들이 있을 경우, 독자들께 서 과감하게 고쳐주기를 당부 드린다. 새로운 사실들을 거듭 확인하고 수정 해 가는 행위야말로 보다 나은 역사 이해를 위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 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우‘역사 속의 영남 사람들’ 편찬위원장·대구한의대 교수
*李瀷이 본 영남풍속
경기도 남인 출신으로 평생토록 영남을 동경한 조선후기의 위대한 실학 자 이익은 영남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조선 팔도 가운데 오륜이 구비된 지역은 영남 한 지방뿐이다.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산천의 형세로 그것의 증명이 가능하다. 대개 영남의 큰 물줄기는 낙동강인데 사방의 크고 작은 하천이 일제히 모여들어 물 한 점도 밖으로 새나가는 법이 없다. 물이 이와 같으면 그 산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인심이 한데 뭉치어 부름이 있으면 반드시 화답하고, 일을 당하면 힘을 합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훌륭한 학자들이 대 대로 일어나 스스로 성세를 이루어 변할 수 없게 되었다. … 풍속으로 말 하자면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으며 … 유사시에는 솔선해서 난에 임하여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으며, 글을 읽고 도리를 말하여 그 행신과 재능이 밖으로 드러나는 자가 있으면 옷깃을 여미고 스승으로 높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후한 풍속, 즐거운 땅, 인의의 고 장이라 할만한 이유이다. … 공자가 ‘능히 예로 사양하면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했으니, 오직 영남만이 이런 것이라 하겠다.”” (성호사설 ‘영남 오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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