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는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의회민주주의의 요람인 영국 의회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국회는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할만큼 더욱 막강하다.
한국의 국회는 세계 민주국가에 공통된 규범이자,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3권분립원칙을 뛰어넘어 행정부의 영역까지 지배할 만큼 막강하다. 이 나라의 국회는 첫째 마음만 먹으면 ‘특검’을 만들어 행정부의 검찰권 위에 군림하고 있다. 특검은 검찰과 공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검찰이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심지어 송두환특검팀의 퇴장에 불복해서 제2의 대북송금의혹수사 특검을 요구했다. 한나라당은 6·15공동선언을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선까지 특검을 밀어 부칠 기세다. 한나라당은 또 ‘방송개혁’이라는 이름아래 이 나라의 방송을 뒤흔들 채비를 하고 있다(6월25일자 ‘방송쿠데타 경보’ 제하의 본란).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
한나라당의 이른바 ‘방송개혁안’은 KBS만을 유일한 공영방송으로 남겨 놓을 작정이다. 그러나 그 마저도 예산심의권을 국회에 넘기도록 방송법을 고치겠다고 했다(3일).
두말할 것도 없이 공영방송 KBS에 대한 최종적 행정책임은 정부에 있다. KBS사장을 KBS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제도적 절차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일본의 공영방송 NHK의 예산이 의회의 심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들어, KBS의 예산도 국회의 심의를 받도록 방송법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일본의 예를 들어 KBS의 예산을 국회가 심의하겠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일방적 주장이다.
내각책임제하의 일본의회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집권당이 지배한다. 국회가 공영방송의 예산심의권을 갖는다는 것은 집권당주도하에 심의·승인하는 제도임을 뜻한다.
한국처럼 국회를 야당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국회가 공영방송의 예산심의권을 갖는다면, 공영방송의 관할권은 대통령책임제하의 정부가 아니라 야당이 장악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국회의 공영방송예산심의권은 내각책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논리적 맥락을 무시하고, 공영방송의 예산을 정부의 손에서 빼앗으려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특검을 통해 검찰권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공영방송이라는 또 하나의 영역에서 관할권을 행사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2002년도 KBS결산안 승인을 부결(1일)시킨 뒤에 나온 것이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KBS가 법을 어기고 예비비 120억원 중 112억원을 임직원에게 연말성과급으로 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론장악 위한 원대한 계획
KBS측은 “예산서 규정에 따랐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한나라당은 일방적으로 KBS의 예산편성을 틀어쥐겠다고 나섰다. 공영방송체제를 일거에 미국식 상업방송체제로 바꾸고, 신문·방송의 결합을 허용한다면 과거의 소련처럼 공룡급 언론의 독점지배체제구축은 땅짚고 헤엄치기보다 쉽게 될 것이다(6월25일자 ‘방송 쿠데타 경보’제하의 본란).
이처럼 심상치 않은 일련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한나라당은 언론장악의 원대한 목표를 향해 일관된 계획을 구상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특검에 이어 공영방송의 예산까지 틀어쥐게 된다면, 국민이 선출한 노무현정부 외에 또 다른 행정부의 영역이 그만큼 확대될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사실상 두 개의 행정부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 국회는 아마도 머지않아 ‘여자를 남자로 만들고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기적까지’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32년 동안 군사독재가 이 나라를 지배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무소불위의 ‘국회독재’를 보고있는 느낌이다. 그들의 당면목표는 방송장악이다. KBS예산심의라는 그럴싸한 주장은 방송장악이라는 큰 빙산의 지극히 작은 ‘일각(一角)’이다. 언론종사자와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한 고빗길에 올라 선 것이다.
정경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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