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음식점에 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고나니 과일을 내옵니다. 과일을 한두 쪽 먹었더니 뱃속이 꽉 찼는지 물 한 모금도 더 마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먼저 먹은 음식 때문에 배가 그렇게 부른 것일까요 아니면 나중에 먹은 과일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요? 무슨 싱거운 질문이냐구요? 요즈음 이것과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과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올해(2006년) 8월과 9월에는 몇몇 언론매체에서 '한방으로 말기암 환자 치료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 기사는 모두 새로 문을 연 동서신의학병원이라는 이름도 희안한 병원에서 발표한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획기적인 결과를 발표했는지 궁금하여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본 자료는 최원철 씨의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옻나무 추출물(Nexia)의 안전성 및 항암효과에 관한 연구'와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 심포지엄 자료집 '2006년 암치료 EBM 심포지움 ; 한의학은 암을 치료할 수 있을까?'입니다.
어떤 약의 효과를 확인하는 연구를 할 때에는 다른 치료를 전혀 받지 않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환자에게 나타나는 효과가 실험 약물의 효과인지 아니면 병행한 다른 치료의 효과인지 혼동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환자가 현대의학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전체 연구 대상 216명 중에 수술 128 명, 항암치료 148 명, 방사선치료 69명, 옻나무 추출물과 항암치료 병행 40 명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학의 치료를 받지 않고 옻나무 추출물만 투여받은 환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아예 밝히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에게 짜장면과 김치, 불고기와 김치, 햄버거와 김치, 김밥과 김치를 함께 먹게 하고서 김치 덕분에 사람들 배가 부르게 되는지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연구하여 환자에게 나타난 효과가 옻나무 추출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기껏 해야 현대의학의 치료에 부가적인 효과를 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심포지엄 자료집에 소개한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의 예입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치료하지 않으면 몇 주에서 몇 달안에 사망하고 항암치료를 하면 어린이 환자의 80%, 성인 환자의 30 - 50%가 병이 낫고 오래 생존하는 병입니다. 이렇게 병이 치료되고 오래 살게 되는데 필수적인 것이 '완전 관해('완전 관해'는 백혈병 환자의 피속은 물론이고 병의 근원이 있는 골수에 암세포가 거의 없어진 상태, 즉 완치에 가까운 상태를 말합니다)'입니다.
'Nexia를 투여한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의 임상증례군 보고'라는 자료에 옻나무 추출물로 치료하여 병이 치료되고 오래 살고 있다고 소개한 아홉 명의 환자는 모두 현대의학으로 항암치료를 받아 완전 관해에 이른 다음에 옻나무 추출물을 투여받았습니다. 그 중 한 명인 PYJ의 예를 보면 현대의학의 관해유도과 방사선치료로 완전 관해 상태가 된 후에 3차례의 공고요법(완전 관해 상태에서 골수에 약간 남아있는 암세포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하는 항암주사치료), 말초조혈모세포 이식 등의 치료를 받은 후에 옻나무 추출물을 투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문기사에는 이 모든 환자들이 옻나무 추출물로 병이 치료된 것처럼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완치에 필수적인 과정을 옻나무 추출물이 아닌 현대의학의 항암요법을 통해 이루었으므로 이는 거짓입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의 치료효과에 옻나무 추출물보다는 현대의학의 항암치료가 결정적이라는 것은 심포지엄 자료집에 SKH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9세 남아 환자의 경우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가 일단 완전 관해를 이루었더라도 다시 백혈병이 재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환자가 그랬습니다. 이 환자는 항암요법으로 완전 관해에 도달한 후 옻나무 추출물을 투여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백혈병이 재발하였습니다. 환자는 다시 항암치료를 받고 2차 완전 관해에 도달하였습니다. 그 후로 항암요법을 계속하면서 옻나무 추출물을 투여받았고 그 뒤로 백혈병이 재발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환자의 예를 보면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는 옻나무 추출물이 아닌 항암요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구방법이 적절하지 못하면 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연구 방법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옻나무 추출물이 암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언론매체에서 '말기 암환자 韓方으로 생존율 높여(동아일보 2006년 8월 23일자)', '옻나무 추출물 암 치료 효과(중앙일보 2006년 9월 20일자)' 등의 제목으로 보도된 것을 보면 연구자가 연구 방법에 대하여 전혀 개념이 없거나, 새로 문을 연 동서신의학병원을 선전하기 위해 설익은 연구결과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동서신의학병원의 암센터에는 환자가 밀려들어 1년치 예약이 잡혀있다고 합니다. 연구 내용이야 어쨌든 병원 선전에는 성공한 셈입니다. 당사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기사를 실은 언론매체와 기자들은 병원의 선전도구로 사용된 셈입니다. 만약 기자들이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자료를 받아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고 확인했더라면 그런 엉터리 기사를 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기사를 쓴 기자들은 이 글의 맨 앞에 예를 든 문제에서 '음식'이 아니라 '과일' 때문에 배가 부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았더라도 똑같은 기사를 내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자세한 내용도 모른 채 엉터리 기사를 보고서 동서신의학병원으로 달려간 환자들만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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