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식인 74人이 본 한국 언론의 위기
ㆍ“신뢰위기 공감” 94.6%
경향신문이 지난달 17일부터 30일까지 지식인 74명을 상대로 한국언론 현실과 경향신문의 역할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 다수가 한국언론이 신뢰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는 경향신문이 31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언론학자 19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한 결과와도 일치했다.
응답자의 82.4%가 한국언론의 ‘신뢰위기’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인식에 ‘동의한다’고 답했고, 12.2%도 ‘대체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위기상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응답자 74명 중 5.4%인 4명에 불과했다. 국내 언론학자 19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6.7%가 ‘우리나라 언론은 위기상황에 있다’고 우려를 표한 바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언론위기에 대한 진단은 언론학자들과 차이를 보였다. 언론학자들의 절반 가까운 49.5%가 언론위기의 원인으로 ‘언론사의 특정 정치세력에 편향된 태도’를 들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정치세력에 대한 편향성을 뜻하는 ‘당파성’(10.8%)은 가장 큰 원인이라기보다 여러 원인의 하나로 지적했다. 특정한 신뢰위기 원인이 부각되기보다는 ‘보수 언론의 행태’(14.9%) ‘권력화(13.5%)’ ‘객관성 상실’(12.2%) ‘이념편향성’(8.1%) 등 한국언론의 문제점이 두루 나열되었다. 한국언론의 신뢰의 위기가 한국언론의 여러 문제가 종합된 결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고종석씨는 “사실상 가족경영을 하는 주류신문들 다수가 정치세력화함으로써 적잖은 독자들이 신문들의 발언을 어떤 정파의 발언으로 여기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며 “이들 ‘정치신문’들이 수행하는 건 시시비비를 가리는 전통적 언론활동이라기보다 일종의 선전활동이며 그것이 신뢰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또 “종이신문에 인쇄된 기사의 신뢰성이 인터넷 공간에 펄럭이는 정치적 견해들의 신뢰성을 상회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언론이 스스로 권력화되어 신뢰 위기를 불렀다’는 응답도 많았는데 이는 언론 위기 원인 중 1위로 지목된 ‘보수 언론의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는 “언론이 소통을 촉진하고 다양성을 길러내는 시민사회의 보루 역할을 하기보다 권력 싸움에 관여하면서 신뢰의 위기가 생겼다”며 “권력이 된 언론이 다른 권력과 대결을 하면서 사회는 단절되고 의미의 순환은 정지됐으며 모든 것이 편가르기식이 됐다”고 지적했다.
언론 종사자들의 전문성과 기자정신 실종을 우려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사계절출판사 강맑실 대표는 “팩트의 신뢰와 견해의 신뢰, 둘 다 부실하다”며 “사회정의와 실사구시, 지식인적 소명의식을 추구하는 기자정신이 박약해지고, 부와 권력 지향, 대중추수성이 강해졌다”고 강조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심광현 교수는 “한국 언론의 신뢰 위기는 언론 종사자 자신의 기회주의와 언론생산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의 만성화된 기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심 교수는 또 “자본과 국가가 부패해 가는데 주류 언론과 지식인들이 덜 부패하다는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외환 위기를 전후로 한국자본주의는 명시적 위기 상황에 접어들었고 주류 언론은 급격하게 심화되는 통치성의 위기와 경제 위기를 봉합하는 데 전념해 왔다”고 지적했다.
‘자본의 간섭’ 역시 언론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혔다. 노르웨이 국립 오슬로대 박노자 교수는 “편집권 독립성이 불충분하게 보장돼 있는, 자본(광고주 등)에 예속돼 있는 언론을 서민들이 믿는다면 그 서민들이 바보”라며 “그동안 너무 많이 속아왔다”고 말했다.
서울대 김세균 교수는 “많은 신문들이 대자본과 기득권층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공론의 조작을 서슴지 않고 있다”며 “공론 형성을 통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 내는 데에 기여하기보다, 권력·자본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다른 견해를 매도하는 담론적 폭력 장치로 전락한 신문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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