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병이 들어 와도, 하도 죽는 일이 많아서 서로 이름도 묻지 않고 전투를 치르곤 했다. 가끔씩 자신이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를 재미삼아 늘어놓을 뿐이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 아닌 지어 낸 말이라고 해도 소중하게 들어 줄만한 것이었다.
어느 날 푸른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참호에 페인트칠을 하던 때였다. 적에게 노출되기 쉬운 반짝이는 쇠붙이마다 누런 페인트로 칠을 하고 있었다.
보충병이 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동료가 붓을 들고 말했다.
“또 한 놈 오는군! 야, 이 개새끼야. 너 여기 처음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어디, 이리 와 봐.”
보충병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쪽 어깨, 이리 내밀어 봐.”
오른쪽 푸른 군복 위에 붓으로 누렇게 ‘一’자를 그었다.
“저쪽도 내밀어 봐.”
그리고 다시 ‘一’자를 긋고는 말했다.
“너는 이등병이다. 이 개새끼야! 한 놈 죽이고 죽거나 말거나이다. 이왕이면 이등으로 두 명을 죽이고 죽어라. 이 개새끼야!”
평소에 인민군들은 붉은 피 색깔의 별 하나 계급장이 있는데, 왜 우리는 없느냐며 불평을 늘어놓던 늙수그레한 군인이었다. 전쟁 전에는 철학도로서 화가가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다음 참호 내부에 있는 동료들을 훑어 보았다.
“야, 너는 두 번째 보충되어 왔지? 이리 와 봐.”
그리고 군복 어깨 위에 ‘二’ 줄을 그었다.
“이 개새끼야. 너는 일등병이다. 일등으로 먼저 적 한 놈 밑에 깔려서 살거나 죽거나 말거나, 일등으로 먼저 적 한 놈 위에서 죽거나 살거나 말거나 해라. 이 개새끼야!”
그리고 자신의 군복을 벗어들고는 등편에 커다랗게 ‘三’을 그었다. 그리고 그 옷을 들어 펼쳐 보이면서 외쳐댔다.
“야, 이, 십팔놈들아! 나는 三八線에 나 三兵이다. 벌써 세 번째 보충되어 왔다. 시체가 이렇게 쌓였어도 아직까지 살아있다. 이 십팔놈들아!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이 개쌔끼들아! ”
그리고 미친 듯이 웃어 제치기 시작했다.
“끼낄낄낄낄....나는 三八線에 一等上士 라시경이다... 대한독립 만세다...키낄낄낄...우하하하.!”
콰콰쾅!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더니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리고전선에는 一 二 三 계급장이 유행처럼 번져가기 시작했다.
다른 부대와 교대했다. 그만큼 많이 죽었다는 뜻이었다. 전투대기 장소에 도착하여 휴식에 들어갔다. 이때야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대기소에서 신임 보충병들을 맞이했다. 살아남은 동료가 키들키들 웃어가며 전투 경험을 자랑 겸 교육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 육박전에서는....먼저 머리를 만져 보는 거야. 머리가 길면 아군이니까 그냥 놔두고, 머리가 짧으면 무엇으로든 사정없이 찔러야 돼. 조금만 늦어도 그냥 끽, 알아들었지. 그리고 계급이 없어. 전투를 한 번이라도 치르고 살아남았을 때라야 계급을 인정해 주지. 중공군에는 모택동 아들도 있다고 해. 그래서인지 몰려오면 아주 대단하지. 철모를 쓴 자들은 정규군이고, 철모를 쓰지 않은 자들은 비정규군이야. 육박전에서는 철모를 쓰지 않은 놈들일수록 더 악바리들이야.”
판돌은 뇌리에 각인된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마니...오마니라고 했었지. 수령 동무나 스탈린 동무가 아니고 오마니라고? 남조선 군도 더러 어머니라고 하며 죽었지.’
판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보충병들에게 다가갔다.
“야! 너는 어떤 이유로 이 전쟁터에 왔어?”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어차피 전투에 들어가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판국이야. 그러니 무슨 대답을 해도 좋아. 야, 너 왜 여기에 왔어?”
“지유? 빨갱이 쳐부수러유.”
“빨갱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 아는 대로 말해 봐.”
“잘 몰라라우. 나라에서 부르고 다른 친구들도 가니께, 이렇게 왔구마니라이. 그런데 왜 밥을 주지 않는다요? 벌써 이틀째 굶고있는디.”
“그럼. 너는 빨갱이가 무엇인지 알아?”
“잘 압니데이. 인민재판해서 우리 할배 죽이삔 나쁜 놈들입니데이. 그 빨갱이 놈에는 내 친구도 있었습니데이.”
“그럼, 너는?”
“알지라우. 지 성이 빨갱이어라우.”
“그런데 여기를 왜 왔어?”
“지는 빨갱이가 아닌깨로 왔습네. 제주도에서 훈련 받다가 거지 죽을 뻔 했습네.”
“그럼, 너는?”
“조국을 지켜려고요. 이북 편을 들면 빨갱이 아닙니까? 그리고 군대 안 가면 빨갱이로 알고, 순경들이 잡으러 오고, 집 안이 아주 난리 납니다.”
“그럼 너는 또 왜 왔어?”
“무신 거옌 고람이신디 몰허우다.”
그리고 다시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뜻 모를 말을 덧붙여가면서 하고 있었다.
“자원해서 왔우다. 가시아방 모몰죽...도새기 몰래 한 보타가리....”
다른 보충병들에게 물어보아도 별 다를 바 없었다. 판돌은 끝으로 물었다.
“여기서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할 사람 있어?”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로도 보충병들이 들어올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매우 흔한 一字無識의 무지렁이 청년들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이들도 필시 전투를 통해 적개심(敵愾心)만 기를 것이 뻔해 보였다. 그리고 훗날 누군가가 ‘왜 그렇게 그들을 미워하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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