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감옥살이 마치고 형사에게 달려간 납치범의 사연
7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다 가석방된 출소자가 출소하자마자 자신을 검거한 형사를 찾았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17일 오후 3시30분 서울 강서구 발산역 사거리 한 커피숍. 짧은 머리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몸은 괜찮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강서경찰서 신동선(50) 경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네, 형님. 보고 싶었습니다." 사내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지만, 말 속에는 진심이 담겼다.
살인미수, 납치강도 등 14가지 죄목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7년 간 옥살이를 하다 올 8ㆍ15 특사로 가석방된 손지태(38ㆍ가명)씨. 그는 신동선 경사에게 "형님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라며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신 경사는 "주민등록증은 신청했니?" "아픈 치아는 많이 나았냐?"라며 그를 친형같이 다독거려주었다.
지난 97년 손씨는 카드빚 2000만원을 갚기 위해 다른 공범과 함께 부녀자를 납치 후 암매장을 하려다 검거돼 결국 쇠고랑을 차게 됐다. 당시 그를 검거한 이가 바로 신동선 경사. 평소에도 범인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던 신 경사는 조사 과정에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됐다.
손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해 왔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결혼으로 출가시킨 그는 그동안 고생스러웠던 삶에서 벗어나 여유 있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개월간 일없이 유흥과 도박에 빠졌고, 결국 전셋집과 가진 것 모두를 탕진하고 말았다.
돈이 떨어진 그는 카드빚을 지게 됐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2000만원이 훌쩍 넘었다. 다급해진 손씨는 어떻게든 빚을 갚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늘어만 갔고 결국 그 당시 유행하던 막가파와 지존파의 범행을 모방해 부녀자 납치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
이런 사연을 알게 된 신 경사는 구치소에 수감된 손씨를 위해 피해자와의 합의에 적극 나서 중재해 주었다. 손씨는 "당시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판사는 1심에서 10년을 구형했는데, 형님이 합의를 봐주셔서 2심에서 8년형을 선고받게 됐다"며 "그때는 세상을 비관해 구치소에서 몇 번이나 동맥을 끊어 자살하려고도 했지만, 형님의 보살핌으로 정신을 차렸다"고 말했다.
신 경사의 따뜻한 손길은 그가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7년 간 수시로 영치금을 넣어주며 옥살이의 고생을 덜어줬다. 지난해에는 치아 치료비 70만원과 교양서적을 사들고 교도소로 직접 찾아가 넣어주기도 했다. 그동안 자활의 맘을 북돋아주기 위해 편지도 써주었다. 7년 동안 둘이 주고받은 편지만 해도 300여 통.
애정 어린 신 경사의 도움과 수감생활 중 믿게 된 예수로 인해 나날이 변해간 손씨는 고등 검정고시 합격, 한자 3ㆍ4급 및 워드 프로세스 2급 자격증을 따는 등 부지런히 삶을 일궈갔다. 그 결과 모범수로 선정돼 1년여의 형기를 남겨두고 지난 14일 특사로 가석방된 것이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세상을 증오하다 더 큰 범죄를 저질렀을 겁니다. 그러나 이젠 정말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맘밖에 없습니다."
손씨는 신 경사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 1년 전부터 교도소에서 나오는 노역비 월 일만원씩을 꼬박 꼬박 모았다고 했다.
"출소하면 형님께 맛있는 저녁 한끼 대접해 드릴려구요. 처음 저를 잡았을 땐 형님이 미웠지만, 지금은 형님처럼 고마운 분이 없습니다."
그는 부끄런 웃음을 지으며 신 경사에게 "제가 오늘 저녁 사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손씨에게 돌아온 것은 신 경사의 애정 어린 걱정과 십만원이었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 나중에 잘되면, 그때 더 비싼 걸로 사. 이건, 적지만 먹고 싶은 거 사먹고."
한참 동안 손씨의 고생스러웠던 수감생활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던 신 경사는 그렇게 그의 마음을 다독거려줬다.
출소 이후 현재 대구갱생보호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손씨도 "이젠 정말 열심히 살아서 가정도 꾸리고, 참되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형님 은혜 꼭 갚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오후 5시40분. 아름다운 재회를 마치고 둘은 일어서야 했다.
"그래, 이제 나 저녁 근무 나갈 시간이다. 또 연락해라. 네가 나한테 보낸 편지 다 모아뒀다. 혹시 딴 짓 하면 보여 줄려구."
신 경사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한번 그를 다잡아 주었다. 친형 같은 그의 말에 손씨도 "저 결혼식 때 형님이 주례 서 주셔야 합니다"라며 밝게 웃었다.
한때 막가파, 지존파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얼마 전 유영철씨의 연쇄 살인 사건과 이학만씨의 강력반 형사 살해 사건으로 세상은 또 한번 크게 놀랐다. 갈수록 잔악해지는 범죄에 대해 "어떻게 저런 일을 꾸밀 수 있을까"란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범인들의 잔혹함을 우선 탓한다. 그들의 숨겨진 원망에 대해선 대부분 잘 귀기울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늘 마음 속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에 목말라 하며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험악한 범죄가 수그러들지 않는 이런 때에, 신 경사와 손씨의 7년 동안의 인연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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