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쪽 벽을 뚫는 방식으로 지난 9일 전남 여수우체국 금고를 턴 박모(44)씨와 그의 10년 지기 친구인 김모(44) 경사가 7년 전에도 같은 수법으로 공모(共謀)해 여수시의 한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빼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박씨를 붙잡아 조사하던 중 미제(未濟)로 남아 있던 당시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DNA가 박씨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후, 추궁 끝에 박씨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26일 밝혔다.

박씨는 2005년 6월 22일 전남 여수시 미평동의 한 은행 현금지급기에 맞닿은 반대편 식당 벽을 드릴 등으로 뚫어 현금 879만원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당시에도 김 경사가 범행을 도왔다고 진술했다. 김 경사는 당시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여수경찰서 형사과 강력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강력팀 형사가 자신의 관할 지역에 있는 현금지급기를 털었다는 얘기다.

김 경사는 25일 밤 긴급체포된 이후 두 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진술을 거부해왔지만, 26일 오후 박씨와의 범행 공모 사실을 시인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 경사는 범행 동기를 묻자, “안 들킬 줄 알았다”고 말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2005년 8월 병원 금고털이와 2006년 1월 축협 현금지급기 절도 등 여수 지역 다른 미제사건에도 두 사람이 연관됐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김 경사는 “2건의 절도 사건 외에 다른 범행에는 가담한 적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이번에도 ‘벽 뚫어서 돈 빼가는’식의 ‘단순무식’한 범행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7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수우체국 금고가 한쪽 벽면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수우체국 금고는 바로 옆 식당 벽면과 맞닿아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한 김 경사는 눈을 번뜩였다. 경찰에 따르면, 김 경사는 올해 대학에 들어간 딸 등록금 대는 게 힘에 부치던 친구 박씨를 부추겼다고 한다.

김 경사는 우선 자신이 지난달 29일 오후 3시쯤 금고가 있는 우체국 내부 벽면을 휴대전화로 찍어서 박씨에게 보여줬다. 우체국 측에는 “관할 지역 방범(防犯) 진단을 하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금고의 위치를 파악한 박씨는 범행 사흘 전인 지난 6일 여수시 월하동 우체국 건너편 화단 풀밭에 산소용접기, 드릴 등의 범행도구를 숨겼다. 이들은 이날부터 서로 휴대전화 연락도 하지 않고 범행 당일에도 휴대전화를 가져가지 않기로 약속했다.

금고털이범 박씨는 이틀 뒤인 8일 밤 10시쯤 자신이 운영하는 여수시 중앙동 분식점 문을 닫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월하동까지 간 박씨는 야산 인근 아파트 진입로에 내려서 논밭을 지나 우체국까지 4km를 걸었다. 길거리에 설치된 CCTV 등에 찍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 경사도 이날 밤 10시 3분 등산복 차림에 흰 모자와 장갑을 낀 채 자전거를 끌고 집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약속한 시간에 우체국 인근 공터에서 만났다.

범행계획을 최종 점검한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김 경사는 우체국 밖에, 박씨는 우체국 건물 안으로. 박씨는 밤 11시 22분 우체국이 입주한 건물 뒤편 창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천장에 CCTV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박씨는 다시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 복도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우체국 후문 천장과 식당 출입문 위에 설치된 CCTV에 준비해 간 흰색 스프레이를 뿌린 뒤, 드라이버로 식당 창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갔다.

박씨는 우체국 금고와 맞닿은 식당 벽면에 진열된 과자를 치웠다. 드릴, 산소용접기 등으로 패널과 금고 뒤 철판을 도려냈다. 같은 시각, 김 경사는 우체국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박씨는 가로 10cm, 세로 12cm 크기로 금고 뒷면에 구멍을 냈다. 박씨는 금고에 손을 집어넣어 현금 5213만원을 빼내 달아났다. 박씨는 용접하는 과정에서 불꽃이 튀지 않게 하려고 원형자석을 이용해 은박지를 고정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식당 바닥에 물까지 뿌렸다.

박씨가 ‘거사(巨事)’를 하는 동안 김 경사는 망을 봤고, 일이 끝나자 9일 오전 4시 47분 집으로 들어갔다. 김 경사의 동선은 모두 CCTV에 찍혔다. 두 사람은 훔친 돈을 절반씩 나눠 가졌다. 박씨에 따르면 김 경사는 돈을 등산용 가방에 넣었다고 한다. 박씨는 이날 밤 인근 야산에 돈을 묻었다고 진술했지만,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다고 해 도난 현금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단독 범행을 주장하던 박씨는 김 경사가 범행 당일 자전거를 타고 집과 우체국을 오가는 장면이 담긴 CCTV를 보여주자, 김 경사와의 공모를 시인했다. 경찰은 25일 밤 9시 40분쯤 집에 있는 김 경사를 긴급체포했다.

박씨와 김 경사의 인연은 박씨가 장례업을 하던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씨는 차량견인업, 분식점 운영 등을 하면서 동갑내기인 김 경사와 친분을 쌓았다. 김 경사는 최근 10년 가운데 절반 이상을 형사과 강력팀에서 근무했다. 경찰은 박씨가 치밀하게 범행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팀에서 오래 근무한 김 경사의 도움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말 김 경사가 박씨의 분식점을 찾았을 때 범행을 처음 계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