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되는 부시의 강성외교
미국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한 '교토(京都) 의정서' 등 기후변화 협약을 이행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그제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실망스런 결정이 아닐 수 없다.
2012년까지 이산화탄소 등 6개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기준으로 미국 7%, 일본 6%, 유럽연합(EU) 8%씩 감축하려던 국제사회의 10년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커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배경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미국 경제에 해가 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의 이익이 최우선" 이라고 강조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세계 인구의 4.6%인 미국은 전세계 온실가스의 25%를 배출하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지구 온난화로 장차 지구촌에 닥칠 재앙에서 미국만 자유로울 무슨 묘수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의 발언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국제적 책임과 약속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는 오만함마저 느낀다.
'힘의 외교' 와 '현실주의 외교' 를 표방하는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겨우 두달 남짓밖에 안됐지만 변화기류가 이미 국제정세 전반에 걸쳐 감지되고 있다.
취임하기가 무섭게 이라크 때리기에 나서더니 최근에는 냉전시절에나 볼 수 있던 러시아와의 외교관 맞추방으로 긴장 강도를 높였다.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 가 아닌 '전략적 경쟁자' 로 규정하고 군사 전략의 주무대를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옮기는 새로운 전략 개념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중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만에 대한 이지스 구축함 판매를 강행할 경우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가늠키 어렵다.
이미 미국은 러시아.중국과 국가미사일방위(NMD) 체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요격미사일 생산을 금지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무시하고 미사일 잡는 미사일을 개발.배치하는 NMD체제 구축을 밀어붙일 태세다.
유럽국을 비롯한 동맹국들 대부분이 NMD에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또 말로는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한다면서도 당분간 북한과 협상할 뜻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워싱턴을 찾아간 한국.일본.독일 등 동맹국 정상들과의 대화도 하나같이 껄끄럽게 끝났다.
외교 경험이 없는 부시 대통령 곁에서 국방부 중심의 강경파와 국무부 중심의 온건파가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내부적으로 조율되지 않은 엇갈린 신호들이 중구난방으로 이어져 국제정세를 더욱 불안한 상태로 몰고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외교에서 원칙과 목표는 중요하지만 수단의 선택에는 유연성이 생명이다.
경우에 따라 채찍보다는 당근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어렵사리 물꼬를 튼 화해.협력으로 한반도에는 실낱 같은 희망의 빛이 보이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명분만 있고 실리는 없는 '강성 외교' 로 한반도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우(愚) 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중앙일보 사설 - 2001.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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