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도덕적 신용불량자
▲ 전여옥·방송인
영화 ‘올드보이’를 보다가 노무현 대통령 생각을 했다. 가뜩이나 우울하고 음침한 영화인데, 대통령을 생각하니 빛조차 없는 바닷속 암흑에 빠져든 듯했다.
■ 드러난 대통령의 거짓말
‘올드보이’ 최민식에게 주인공 유지태는 말한다. “넌- 너무 말이 많아”라고. 깽판이니 쪽수니 하는 표현은 그렇다치고 대통령 못해먹겠으니 재신임해달라, 10분의 1이 넘으면 그만두겠다고 한 노 대통령은 정말이지 말이 많았다. 유지태 아닌 유인태 정무수석이라도 “너무 말씀이 많으십니다”라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올 한해 노 대통령은 정말 말이 많았다. 그리고 탈도 많았다. 그러나 박복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노 대통령의 ‘언행불일치’를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올 한해를 잊기로 했었다.
그처럼 ‘2003년은 잊고 가자’고 거듭 마음 다지던 차에, 엇그제 검찰 발표를 보니 노 대통령의 표현 그대로 눈앞이 캄캄하다. TV뉴스에서 노 대통령의 ‘오른팔’ ‘왼팔’ ‘최측근’ ‘측근’ 그리고 ‘은인’과 ‘지인’ 할 것 없이 모조리 구속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자랑할 것 하나 없는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순교자처럼 행세했고, 한 사람은 정치적 양심수처럼, 또 한 사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TV카메라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 판의 판돈을 댔던 이들도 느긋하고 여유만만했다. 그 여유와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제 그 의문이 풀렸다. 대통령 스스로 ‘정치적 동지’라고 불렀던 그들은 ‘동지’인 동시에 대통령의 ‘공범자’였던 것이다.
검찰 발표대로라면 노 대통령은 선거에서 쓰고 남은 2억5000만원을 선봉술씨에게 주었다. 또 후원회장 ‘이기명 선생님’의 용인땅을 팔아 장수천의 빚을 갚았다. 또 ‘억’과 ‘천’을 받았던 자리에 ‘확인용’ 내지 ‘눈도장 찍기’를 위해 동석했다.
그럭저럭 돌고 돈 돈이 60억원인 셈인데 10분의 1이 넘는가, 안 넘는가를 이제 대통령과 국민이 함께 따져야 할 판국이 됐으니 어쩌다 우리나라가 이런 꼴이 됐나 싶다. 그 ‘10분의 1의 조건’을 내세웠던 노 대통령은 유달리 ‘깨끗함’ ‘도덕성’을 강조해와 더 그렇다.
노 대통령은 재신임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도덕성 하나로 정치해왔으며 도덕성이야말로 내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라고. 그래서 자신의 정치적 자산에 약간의 생채기도 참을 수 없으니 재신임해달라고 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바로 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인가 생각했다.
추잡한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으로서 ‘오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노 대통령이 도덕의 사치와 허영에 빠져있구나 생각했다. 현찰 한푼 없이 명품을 갖고 싶은 허영에 들떠 카드를 북북 긁어댄 철없는 20대처럼 ‘도덕적 카드’를 저렇게 사용한도 없이 긁어대는구나 싶었다.
■ 씁쓸한 '올드보이'의 결말
말도 많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바꾸기도 전문가인 노 대통령은 ‘리멤버 1219현장’에서는 ‘떡밥론’을 내세웠다. ‘상대방이 떡밥을 왕창 뿌리는데, 내 그물에 한 마리도 안 들어오는데 떡밥 안 뿌리고 버틸 수 있냐’고 했다. 한치의 도덕성의 손상도 용납할 수 없다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말과 ‘나도 떡밥을 뿌렸다’는 여의도 현장발언은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사람이 많은 것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 한 것은 참을 수 없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서민들 푼돈으로 대통령이 된 것처럼 청와대 내에 돼지저금통 모형물까지 만들며 고도의 도덕성을 파는 사기극만 벌이지 않았어도, 국민들은 이렇게 허탈하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지갑엔 그가 말했던 청렴함도, 정직함도, 도덕성도 없었다. 더럽디더러운 자신의 창자 속을 생각지 않고 마음껏 ‘도덕적 카드’를 분에 넘치게 쓰다 마침내 대책없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대통령을 지켜보는 이 연말, ‘올드보이’의 결말이 씁쓸하다.
(전여옥·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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