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지만원
Subject
어느 한 386운동권 여성의 회한!
운동권 수기들로 엮어진 ‘진터골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도서출판 현사연). 그 중의 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부유한 집 가정에서 자란 여학생, 대학 1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대학가에 최루탄이 난무했고, 캠퍼스로 경찰이 진입하는 바람에 갈 곳 몰라하는 학생들이 우왕좌왕 터진 봇물처럼 흘러다녔다. 이 어지러운 순간에 어느 한 남학생이 그녀를 낚아채 뒷동산으로 올라가 숨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노동운동에 끌려들었다.
남자 선배가 노동자의 비참한 환경과 보수에 관한 통계를 열거하며 울분을 토할 때, 그녀는 자기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방학 때면 3개월씩의 공활(공장활동)을 했고, 그녀는 운동권의 동지인 남자 선배와 아무런 생각 없이 3년에 걸쳐 동거생활을 했다.
운동권에 동거는 자연스러운 상식에 속했다. 사랑을 느껴서 동거한 것이 아니라 운동을 위해서느 무엇이든 정당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운동의 편의상 동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임신을 했다.
운동권 남자에게 임신은 귀찮은 존재였다. 남자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고, 운동권 선배언니의 안내를 받아 태연하게 낙태수술을 했다. 운동권 여학생들에게 낙태는 하나의 당연한 통과의례였다.
4학년이 돼서야 정신을 가다듬게 됐다.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라며 멸시와 조소를 받고, 나약한 감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자 죽음까지를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키워야 했을 캠퍼스의 문화 생활을 뒤로 하고, 겉을 가꾸고 속을 채워,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으로 조각해야 할 유일한 적기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그녀는 증오심과 적개심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한 이름 없는 소영웅에 매로되어 귀중한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회한은 있어도, 복귀는 없는 인생행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회한'이라는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을 다른 것으로 보상 받을 수 있다 해도 '회한'이라는 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고 졌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꿀 한 방울 저장 된 게 없으며, 세찬 비바람을 수없이 맞고 다녔지만 그녀에게 붙은 주홍글씨는 지워지지를 않는다.
그녀의 회한, 일부를 발췌해 본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스스로를 민주화투사라고 자부하면서 우리는 가장 비민주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폐쇄되고 강압적인 우리의 활동이 싫어졌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면 악순환이 계속될 게 뻔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면 반동분자로 취급되기에 아무 말 없이 따라야만 했다.”
“타협을 멸시하는 반면 투쟁을 정당시 하고, 이해와 관용을 죄악시하는 반면 미움과 적개심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운동권 선배들, 나는 이들에 반기를 들고 말았다.”
“구로공단 노동현장에서 잠잘 장소를 얻기 위해 정조를 버리라는 여성 노동자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나는 아무 것도 아쉬운 것 없는 상태에서 순수와 정조를 주었다. 나도 그들처럼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준 것이다. 운동권에 뛰어든 이상 정조는 운동권 선배들의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목적만 훌륭하면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는 믿었던 것은 오만이었다. 인간이기에 지켜야 할 규범이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일체 무시하고 이념만 중요시했다. 이념 앞에는 귀중 한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앞서 운동가와 투사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은밀한 행위조차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 졌다."
"싸우는 것은 진리나 옳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를 위해서야 했지만,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오직 이념적 신념을 위해 목숨 바치는 소모품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영국의 강압정치에 맞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한 간디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빈부의 격차를 느꼈다고 이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하겠니? 나라가 혼란하다고 너도나도 나서서 설쳐 댄다고 질서가 찾아질 것 같으니? 사회 구석 구석에 숨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착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진정 이 나라가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겠니? 뒤집어엎고 나면 이런 사람들이 저절로 생기다던?”
“대학이 무엇이던가? 한 사회, 한 국가, 한 겨레의 문화를 창조하는 산실이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신성한 곳에 폭력문화만 키워온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을 하고 싶어 돈을 열심히 버는 사람이 있다.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생활을 하고 싶어 열심히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이 있다. 돈과 권력 따위를 초월하여 학문이나 봉사의 삶을 통해 자유인이 되려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이 되어있는가? 민중에게 참자유를 얻어주기 위한다는 구실로 민주화의 이름을 걸고 폭력 투쟁을 하는 것이다.”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을 쥘수록 권력의 노예가 되며, 학문의 깊이가 더해가고 봉사의 연륜이 쌓일수록 자유를 잃고 교만과 위선의 노예가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에게 묻는다. 제도권에 안주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버리고 민중의 자리로 내려와 민중에게 참자유를 찾아 주겠다던 우리의 모습은 어찌 되었는가? 독선과 아집과 소영웅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지 않은가!”
“위대하지도 않고, 위대할 수도 없는 하찮은 나 자신을 ‘민중’ ‘민족’ ‘이념’ 같은 것에 동일화하여 자기확대와 자기최면를 통해 소영웅이 되었고, 그 소영웅주의에 빠져 행복감을 맛보아 온 것이 아니던가?”
“남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꿈, 남이 주목해주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꿈, 누구에게나 다 있는 꿈이 아니던가? 내가 오늘날과 같이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 것은 이런 허황된 꿈 때문이 아니었을까? 욕심이 눈을 멀게 했고, 욕심이 있었기에 유혹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그 욕심 앞에 여자의 정조도 아무렇지도 않게 바쳤다. 오늘도. . .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빈 가슴을 이토록 시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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